김경주 시집 민음사
바늘의 무렵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
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
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
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을 찾
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
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마침내 아주 작은 책이 되어 버린 어떤 '무렵'
이 책의 효과는
눈을 감고 있으면
누구나 잠시 후 자신이 바람이 된다는 걸 알기까지
눈을 감은 채
나는....... 바람이....... 된다......
라고
자신의 눈에게 속삭일 때까지
눈을 감고
당신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한 번만 생각해 보아라
그대여 잘 흘러가고 있는가
그곳이 어디든
바람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이제 눈을 뜨면
누구나 자신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바람의 시차라고 생
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눈이 되어 바람이 돌아올 즈음
무용수의 발처럼
눈을 감은 채
누구나 자신의 무덤 속에 한 번은 누워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음역이다
종이로 만든 시차3
-종이연
좋은 연을 만들기 쉬해서는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좋
은 바람을 상상할 줄 아는 것이 먼저다.
연은 일단 손을 떠나기 시작하면 바람과 가장 닮은 시
간을 찾고 바람이 멀리서 듣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옮기고
있는 느낌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연을 실로부터 풀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이 바람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기다리면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바람이 연을
데려간다. 연날리기란 바람과 연 사이에 '긴 현' 을 놓아
주는 것에 불과하다
공책 한 권을 앞에 놓고 이것을 종이비행기로 바꿀 것인
가, 종이배로 바꿀 것인가의 갈등이 우리가 지금까지 날리
고 있는 연의 항해이다. 그 시차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어
딘가로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는 일이 허공에 쌓
이고 있는 하나의 사회로 우리가 드나드는 일이듯이, 시란
질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선을 믿어야 한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연처럼,
그 시차에 서명한다.
"진정한 여행자들은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이다."
- 보들레르.<여행> -
"여행의 언어는 시차이다. ...... 여행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시차를 겪다가 오는 일종의 경험인데, 그 경험의 끝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시차를 겪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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