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시집 문학동네




만화방창


내안

어느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웠습니다






그대

앞에서




방창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홍매



깜박 속았지

한낮에 붉은 입술

캄캄했어

눈 떠보니

가만히 닿던

그 서늘함

흔적이 없었지

꿈이었지

한낮의 꿈

붉은 너의 입술

산을 열고

도를 열고

흙담을 나와

너는 

내 마음속

가장 어둔 곳에

살짝 치껴뜨는 속눈썹 같은

한 송이 꽃이었네




남쪽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환장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앉아 놀다가

한줄기 바람에 날려 흐르는 물에 떨어져 멀리 멀리 흘러 가버리든가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오래오래 

앉아 놀다가 산에 잎 다 지고 나면 늦가을 햇살 받아 바삭 바삭 바스라지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리둘이 똑같이 물들어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버리든가



마른 장작



비 올랑가

비 오고 나면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면 꼭 좋겄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겄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봄비




비가 오네요

봄비지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앞강에 물고기들 오르는 소리에

문득 새벽잠이 깨었습니다







새 울고 

비 오네

빗소리 속에

새 울고

그대 그립네

가을이 이렇게 와서

새소리처럼 머물다가

가네 

새소리 

따라가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삷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들어

꽃,

다졌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며 햇살을 쏟아냅니다 눈이 부시네요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지요

차들이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늘 보던 풍경이 때

로 낯설 때가 있지요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지요 어디만

큼 오고 있을 그대를 생각합니다 그대가 오는 그 길에 찔레꽃

은 하얗게 피어 있는지요 스치는 풍경 속에 내 얼굴도  지나가

는지요 참 한가합니다 한가해서,  한가한 시간이 이렇게 아름

답네요 그대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생각하다가 나는,  무슨 생각이 났었는지,  혼자

웃기도 하고,  혼자 웃는 것이 우스워서 또 웃다가, 어디에선지

 불쑥 또다른 생각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생각을 이을 필요

도 없이 나는 좋습니다 이을 생각을 버리는 일이 희망을 버리

는 일만큼이나 평화로울 때가 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

뭇잎이 흔들립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서 그대를 기다릴

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지나 갑니다 아! 산다

는 것,  사는 일이 참 꿈만 같지요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내가 내 편이 아닐 때에도 당신은 내 편이었지요

어디만큼 오셨는지요 차창 너머로 부는 바람결이 그대 볼

을 스치는지요 산과 들, 그대가 보고 올 산과 들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갑니다 기다릴

사랑이 있는 이들이나, 기다리는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

들은 행복합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도

세상도 저기 가는 저 수많은 차와 사람들도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사랑은 어디서든 옵니다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색다른 사랑이 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



작은 찻잔을 떠돌던 노오라 산국차 향이 아직도 목젖을 간질입니다

마당 끝을 적시던 호수의 잔물결이 붉게 물들어 그대 마음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렸지요

지금도 식지 않은 달콤한 꽃향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모르겠어요

온몸에서 번지는 이 향이

산국 내음인지 당신 내음인지

나 다 젖습니다



첫사랑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쌍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봄날은 간다




진달래


염변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

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 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성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치라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

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

은 다 같니라




무심한 세월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잉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낙화유수



머리가 허연 할머니 한 분이 마을에서 걸어나와 옷을 입은

채 강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허연 머리끝까지 강물에 다

잠기고,  연분홍 산복숭아꽃 이파리 한 장이 물 위로 떠 오른

다 꽃잎이 일으킨 물결이 강기슭에 닿을 때,  강굽이를 돌아가

던 꽃 이파리가 마을을 잠깐 뒤돌아본다


햇살이 고운 봄날이다




이십일 년 전



나하고 사니라고 애썼네이인

사는 것이 참 금방이구만

사는 것이 바람 같은 것이여

머리맡에 앉은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아버지는 자기의 일생을 그렇게 정리하셨다


이십일 년 전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눈길 가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비시선 184 옛날 녹천으로 갔다  (0) 2018.06.22
루비아야트  (0) 2018.06.20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0) 2018.06.18
순간의 꽃 고은 작은시편  (0) 2018.06.16
피천득시집 생명  (0) 2018.06.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