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 시집 민음사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

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

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

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

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

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

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

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개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커피를 쏟다





산의 한쪽 어깨가 날아가 버린 날.  난 그저 통조림 뚜껑

을 였었고,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 그

들과 나의 폐활량 차이를 궁금해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몇

개의 산맥을 넘어가 버린 날도 난 그저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을 뿐입니다.  다 세월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뿐 지나가 버린 일입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

히는 일이나 후진하다 담벼락을 들이받는 일조차 원래 일

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


나는 언제나 내 강물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강물을 보고


그나마 세월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것만 겨우 알았을 

뿐입니다.

원래 일어날 일들이었습니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슬픈 빙하시대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

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

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

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

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

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달리기





두 발로 선 대신 뇌가 무거워졌습니다.  수백만 년 전의

대가.


처음엔 삶의 한 풍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고,  그다음엔

저기에 사랑이 있다고 해서 달렸습니다.  신념이나 욕망 같

은 것들을 어깨에 얹고 달렸습니다.


곡선주로를 빠져나온 그 어느 날 이것저것 다 빼면 달리

기만 남았습니다.  성채를 지을 것 같았던 신념도 내 것이

아니었고,  기름기 잔뜩 밴 욕망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

보니 사랑도 없었습니다.


달리기만 남았습니다.

한 사람이 불현듯 자유롭습니다.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

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

라며 시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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