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민음사
그대 잠을 깨라. 어느새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낸 후
술탄의 성탑에 햇빛을 내리쬔다
아침의 허망한 빛이 사라지기 전
주막에서 들려오는 저 목소리,
<사원에 예배 준비가 끝났거늘
어찌하여 기도자는 밖에서 졸고만 있나>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 짧디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성현들과 더불어 지혜를 씨부리고
내 손수 공들여 가꿔봤지만
마침내 거둔 것은 다음 한마디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어쩌다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물처럼 세상에서 속절없이 흐르다가
사막의 바람처럼 세상을 하직하고
어디론지 속절없이 가고만 있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나?
부질없는 것일랑 묻지 말게나
한 잔, 또 한 잔, 금단의 술
덧없는 인생을 잊게 해주리
너와 나의 이야기도 오직 잠시뿐이런가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
그것을 밝혀볼 등잔을 찾아
두 손 들어 어둠 속을 헤매었으나
밖에서 들리는 그 한마디는 <눈먼 너속의 나>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대고 속삭이는 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전, 한번 가면 못오리>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두려워 마오, 삶을 끝막는 죽음
어찌하여 그대와 내게만 있을쏜가
거품 같은 삶을 빚는 영원한 사키
앞으로도 쉴 새 없이 거품 빚으로
그대와 내가 함께 장막을 지나가도
이 세상은 오래오래 살아 남으리
바닷물에 밀리는 조약돌 인생
머물다 간다 한들 아는 체할 세상인가
잠시동안 머물며 덧없이 맛보노니
사막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삶이로다
보라, 허무에서 태어나 허무로 돌아가는
저 유령 같은 대상, 오 서둘러 살자
반짝했다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인데
벗이여, 삶의 비결 찾느라 인생을 보낼 건가
허위와 진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말해 보오, 무엇에 의지하여 일생을 사나
허위와 진실이 종이 한 장 차이라면
그렇소, 알리프 한 자가 비결이 되오
그 쉬운 비결만 찾아낸다면
갈 수 있으리, 보물 집으로, 하늘나라로
창조물의 핏줄 속에 수은처럼 흐르면서
인간 고통 외면하는 은밀하신 하나님
만물 속에 그 모습 드러내면서
온 세상이 변화해도 그분은 남네
이것인가 하는 순간 어둠 속에 파묻히니
장막 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 연극,
손수 지은 연극을 연출하며 지켜보니
하나님은 영원히 심심풀이하시나
딱딱한 대지를 굽어봅이나
열리지 않는 하늘 문을 헛되이 바라봄도
오늘 그대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이니
내일이면 그대마저 있지 않으리
이런 노력, 저런 논쟁, 시간을 낭비 말라
부질없는 추구야 허망하기 짝이 없다
쓴맛 나는 열매 먹고 슬픔 참느니
잘 익은 포도주로 즐거워하라
벗이여, 푸짐한 술상을 차려 놓고
새 장가 들던 나를 기억하는가
불모의 이성일랑 침실에서 몰아내고
포도 넝쿨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지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흐르는 세월을 헤아릴 수 있음도
내 수학적 계산의 덕분이라 하지만,
별것 아닐세, 태어나지 않은 내일과
사라진 어제를 달력에서 찾았을 뿐
신성할쏜 포도주는 하늘의 열매
누가 감히 그 넝쿨을 함정이라 모독하랴
마시자, 이 축복을 어찌 마다 할쏜가
그게 만약 저주라면 누가 거기 놓았으랴
이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제
죄 많은 몸 지옥 갈까 두렵다 해서
하늘나라 술 기약에 눈이 멀어서
이승의 삶의 묘약 저버릴쏜가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어둠의 문 거쳐간 이 무수히 많았건만
갔던 길 되돌아와 겪었던 일 고하는 이
한 사람도 없다 하니, 어찌 아니 이상한가
그 길을 알려거든 우리 몸소 가야 하리
경건한 자, 유식한 자, 우리 앞에 나타나서
이러쿵 저러쿵 닥쳐올 일 밝히지만,
믿지 못할세라, 그건 모두 잠꼬대
예언을 마친 그들 잠자리도 다시 드네
저승이 어떠한지 지레 짐작해 보려고
볼 수 없는 세계 속에 내 영혼을 보냈더니
이윽고 돌아온 영혼, 이렇게 답을 했네
<내 자신이 천국이요, 지옥일러라>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우리 모두 기껏해야 환등속의 허깨비
삶의 극을 연출하는 하나님께서
한밤중에 빛을 내는 태양등 켜면
줄을 지어 극을 하는 허깨비들
낮과 밤이 엇갈리는 장기판 위에
하나님이 놀며 두는 힘없는 말들,
이리저리 옮기면서 장군 멍군 찾다가
하나씩 죽어서는 골방으로 들어가네
타구장의 공 처지에 가타부타 있을쏜가
치는 이의 뜻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갈 뿐,
우리들을 이 세상에 몰고 오신 분
그분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리
운명을 기록하는 신의 손가락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기록을 찾네
기도나 잔꾀로야 한줄이나 지울쏜가
눈물로 호소한들 한마디나 씻을쏜가
하늘이라 부르는 뒤집힌 그릇,
그 아래 갇혀서 살다 죽는 인생인데
손을 들어 하늘에 구원을 찾지 말라
어차피 하늘인들 아무 힘이 없는 것을
진실로 참회의 맹세 자주 했건만
그 맹세 하면서 내 정신이 맑았던가?
봄 여인이 장미꽃 손에 들고 나타나면
닳아 빠진 참회야 산산조각 깨어졌네
포도주야 못 믿을쏜, 이 몸을 배반했고
명예의 의상을 이 몸에서 벗겼지만
알지 못할세라, 세상에 그 어떤 값진 것이
포도주 상인들의 상품을 당할쏜가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 혹은 seize the day>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차의 눈을 달랜다 (0) | 2018.06.23 |
---|---|
창비시선 184 옛날 녹천으로 갔다 (0) | 2018.06.22 |
그래서 당신 (0) | 2018.06.19 |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0) | 2018.06.18 |
순간의 꽃 고은 작은시편 (0) | 2018.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