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집 민음사





달팽이 뿔 위에서




사방천지에 잠자는 짐승의 숨소리들이,  세상 가득 상처

난 식물의 코 고는 소리가,  그들이 뱉어놓은 눅진눅진한,

짙은 입 냄새가,  들숨,  날숨,  부풀어오르다 꺼지는 뒷산

의 어깨가,  눈 맑은 꽃,  까칠까칠한 턱,  내 손으로 감쌌

던 두꺼운 손,  늘어진 머리카락들,  길처럼 여린길,  발처

럼 예쁜 발,  코끼리 발자국 속에 무수한 개미 발자국,  흙

속에 묻어둔 사나운 발톱,  바람 한 장에 꿀 한 숟갈,  이

슬을 털다 스스로 놀라는 잎갈나무 숲,  달처럼 해진 달,

물처럼 환한 물,  이윽고 별들의 정수리가 다아 보일 때

나는,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시인 지렁이씨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황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

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진달래 시첩



진달래 바람에 봄 치마 휘날리더라

저 고개 넘어간 사랑마차

소식을 싣고서 언제 오나

그날이 그리워 오늘도 길을 걸어

노래를 부르느니 노래를 불러

앉아도 새가 울고 서도 새 울어

맹서를 두고 간 봄날의 길은 멀다

-이난영,  <진달래 시첩>


스무살 나이엔 봄바람의 설렘을 알았고

서른 살 나이엔 꽃 지는 설움을 알았는데

마흔이 가까워오니 꽃 피는 장관에

눈이 감아지더라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듯

꽃망울 맺히는 모양에 내가 아픈데

아가리를 좍좍 벌리고

비를 받아먹는 여린 잎들이여


우중에 한껏 부풀어오른 야산을 관망하니

산모처럼 젖이 아프더라


쌀독을 들여다보아도

냉장고를 들여다보아도


국그릇을 들여다보아도

배가 고파서 배가 부르더라


여자가 쓰는 물건들은 

왜 하나같이 움푹 패어 있어

무언가 연신 채워 넣도록 생겨먹었는지

이 혹독한 봄날에야

대답을 찾아간다


몽중에 온갖 소원 다 이룰 만치

큰 잠을 잤더라



십일월의 여자들



보기에 좋고 불편한 속옷은 

벌서 오래전에 장롱 서랍 깊이 넣어두었다

그걸 다시 꺼내 입을 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집을 나서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해마다 여행 가방은 부풀어올랐다

떠날 수가 없었다


길게 늘어난 그림자도

나이가 들어 있었다

영락없이 얇고 흐릿했다


바람이 불면 미치도록 펄럭이다 

식량을 담으면 봉긋하고 얌전해지는

구멍가게 비닐봉지와도 같았다


싸가지가 없다고 어린 딸을 때리던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어 있었고


딸에게 의지하여 딸이 된 엄나는 그러나

싸가지가 없을수록 눈물겨웠다


망치는 있고 못이 없었던 시절을 지나와서

이제는 온몸 모서리가 못 자국으로 헐어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서 배운 바대로

아내가 베를 짜는 밤을 엿보지 않는 남자와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어디든 간에

몸을 덮어두기 위해 입는 이옷을

벗어 걸어두는 데가 모두 집이기를 바랐다


-나를 안고 싶으니.

그럴때 말고 바로 이럴 때.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당신의 혀를 노래하다



넘실대는 목젖.  손을 정갈하게 씻고 혀끝을 들춘다.  혀

밑에 수천 마리 벌 때.  시끄러운 소릴 내며 날아오른다.

어떤 노여움.  어떤 집요함.  어떤 막무가내.  어떤 결핍감.

어떤 거부감.  어떤 난감함.  어떤.  뜨겁고 건조한 떨림.

그리고 스밈.  습자지 같은 눈빛.  습자지 같은 찢김.  짜릿

한 아림.  쓰림.  그렇지만 알싸한 휘발.  묵직하게 남은 그

림자.  발밑 수북한 벌 떼의 시체들.  한 그릇의 꿀. 





너의 눈




네 시선이 닿은 곳은 지금 허공이다

길을 걷다 깊은 생각에 잠겨 집 앞을 지나쳐 가버리듯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꿰뚫고,  나를 지나쳐서

내 너머를 너는 본다

한 뼘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너의 시선은 항상 지나치게 멀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너를 보고 있으면서도

내 뒤를 느끼느라 하염이 없다


뒷자리에 남기고 떠나온 세월이

달빛을 받은 배꽃처럼

하얗게 발광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너의 눈에

나는 걸어 들어간다


그안에서 다시 태어나 보리라

꽃 피고 꽃 지는 시끄러운 소리들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숨어 살아보리라




일요일



식어가는 차와

차 한 잔의 경건함

테이블  50cm  폭의 광활함

각설탕처럼 쟁여 있는 창밖 햇살


보이진 않지만 바람의 거센 호흡

허리가 굽은 행인

그 손엔 검정 비닐봉투의 악다구니


고단한 바람의 광기

나무들의 헤드뱅잉

그 안에 갇힌 구관조 한 마리

무덤이 될 수 없는 날개

그 날개를 얹고 날기만 하는 새


겨울 외투의 무게

두 눈 속에는 핏발

냉장고에 넣어둔 들꽃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말

향기를 지워가는 지우개의 희히ㅡ낙락

가고 오지 못하는 질문과 대답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전구

감전되는 나무들

혀로 핥아주는 상처

담배 한 모금

바람 두 모금




순도




함박눈이 저렇게 허공을 메우며

한없이 내리는 것을 보노라니

허공이 비어 있을 때보다도 더

허해 보인다

눈이 온다는 사실이 나리라

허해 보이는 허공 때문에

눈물이 나려는 것이다

저리도 황활한 허공이

이리도 빽빽한 지상을

눈여겨보라며

눈을 내려 보낸다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본 자의 지독한 외로움을 더 지독하게 하려고 

눈은 밤을 새워

제 눈물을 꽝꽝 얼린다




기일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기도도 듣지 않는다 한다

죽은 이들의 기도만 듣는다 한다- 김종삼의 시 <벼랑바위> 중에서



산 자들이 날마다

순교하며 스러져가는 태양의 모퉁이

몸을 뒤척이며 잠은 들게 마련




가족사진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젋고 환한 아버지 이마 아래.  그 눈빛 닮은 아들이 있

었고,  그 튼튼한 한쪽 다리 위에 큰딸이 앉아 있었고,  고

운 어머니 품에는 막내딸이 있었다

플래시가 터졌을 때,  토끼처럼 두 눈을 똥그랗게 뜬 다

섯 식구


아버지 칠순을 맞아 또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분홍 한복만이 고운 어머니 옆에 어디를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는 검은 아버지가 계시고 , 큰딸과 막내딸은 벽지처

럼 무늬를 그리고 배후에 서있다 옆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 창문 하나,  창문 밖에는 박제된 여름이 있다


두 장의 가족사진 번갈아 바라보다.  잠든 부모 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불의 능선이 야트막하다 작게 부풀어오

르다 내려앉는 능선의 속삭임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에미 애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워하면서 그

리워 하면서



적막과 햇빛사이



아주 잠깐은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이 방에 찾아온 손님

차 한 잔을 내와서 마주않는다


후박나무가 잎사귀 흔들며 따갑게 퍼덕인다  줄기를 기

어가는 작은 발 개미 하나 그 뒤에 또 하나 또 하나 발발

거리는 발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하나

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시를 썼을까

술 마시느라 밤을 새운 매월당 김시습

헤어지며 드리는 시를 썼을까

홍랑 매창 옥봉 그녀들도

이런 시간에

고요해서 다 들리는 이 시간에

적막해서 다 보이는 이 시간에

껴안았을 때에만 느껴지는 당신의 맥박처럼,  덜컥덜컥

희미하게 다가오는 문산행 기차와 형광등에게 필사적으로

가닿았다  까맣게 내려앉은 하루살이들과 1억 5천 킬로미

터를 직진으로 달려오는 햇빛과


침묵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찻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새벽이 크나큰 손을 뻗어

죽어가던 한세상 눈꺼풀을 마저 덮어준다


햇빛이 난간에 매달린 적막을 떼어낼 때 세상이 살아

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  떨어지며 절규하는 적막 덕뿐에

고막이 터진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저달은 웃으리.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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