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시집 민음의시 민음사





새벽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부치지 않은 편지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폭풍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날으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봄눈




나는 그대 등 뒤로 내리는

봄눈을 바라보지 못했네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대 텅빈 가슴의 말을 듣지 못했네

새벽은 멀고

아직도 바람에 별들은 쓸리고

내 가슴 사이로 삭풍은 끝이 없는데

나는 그대 운명으로 난 길 앞에 흩날리는

거친 눈발을 바라보지 못했네

용서 받기에는 이제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

다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사막처럼 엎드린 그대의 인생 앞에

붉은 무덤 하나

흐린 하늘을 적시며 가네

검정고무신 신고

봄눈 내리는 눈길 위로

그대 빈 가슴 밟으며 가네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새벽에 아가에게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은 있는가 보다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은 있는가 보다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퀴 같은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아직 없나니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지라도

아가야 하늘에는 거지별 하나




가을편지



너는 침묵할 때 간절히 기도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진실로 사랑했는가


마음 착한 이들의 분노를 위해

그립고 푸른 하늘의 위해


너는 침묵할 때 죽음을 생각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어머니가 그리웠는가


가을바람 불어와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흐르던 강물조차 흐르지 않는

이 가을 눈부신 햇빛 속에서


너는 홀로 침묵의 들꽃으로 피었는가

너는 홀로 침묵의 저어새로 울었는가




산성비를 맞으며




산성비를 맞으며

모란이 핀다


오늘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해가 저문다


슬픈 까마귀는 날아서

어디로 가나


살아가는 분노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드디어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위하여


산성비를 맞으며 피어나는

모란을 바라보며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 밥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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