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이레





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꺽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청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 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토막말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 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가시내   <한국 설화집>




사내는풀섶을헤치고빨간뱀딸기를찾았다뒤따라풀섶

에뛰어든계집애의치마폭은이슬에흠뻑젖어있었다나눠

먹자잉하늘엔먹구름이흘렀고여치가찌르르울었다소나

기가내려서사내에는계집애를등에업고분냇물을건넜다

남녀칠세부동석말이야엄청나지만두메산골어린계집애

와사내사이에그런게있을리없다세월이흐르고논두렁에

영산홍이필때황소를끌고가던사내애가그계집애를만나

자얼굴이빨갛게되어말을건넸다니오래간만이다잉계집

에는무슨이유인지는몰라도목덜미까지빨개져서달음박

질을쳤다눈앞에보얗게비구름이밀려오고달리다가엎어

져도무릎은아프지않았다가슴만할딱일뿐이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피는 꽃은 어이 그리 곱고,

지는 꽃은 어찌 그리 서럽던고, 아아, 그 뜨거운 달은

하늘에 어이 그리 오래오래 떠서 질 줄을 모르던고.

사랑은 스스로 길이되고,

사랑은 스스로 벼랑이 되고,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이고,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말이다.

우리네 삶은 아직도 목메게 불러야 할 이름이 많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아직도 목이 터져라 외칠 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아, 종잡을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여!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이여!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가버리는 그찰나여!

사람들아!

사랑은 기도와 같나니,


사람이 사랑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

저문 강가에 나무처럼 서서 하루를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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