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열림원



나무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떤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노인처럼

밤에 먼 하늘을 향해 앉아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는 일



구름은 비를 데리고



바람은 물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새는 벌레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구름은 또 비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나는 삶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달팽이는 저의 집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백조는 언 호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어린 바닷게는 또 바다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아,  나는 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살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펀에 서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들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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