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문학동네



오늘밤 비 내리고




오늘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알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사월 목련




남들도 나처럼

외로웁지요


남들도 나처럼

흔들리고 있지요


말할 수 없는 것뿐이지요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것뿐이지요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월 목련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사랑을 하면서도 잎 지는 소리에 마음 더 쏠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흩어지는 산향기에 마음 더 끌려라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나는 소쩍새 소리에 마음 끌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사라지는 별똥 한 줄기에 마음 더 쏠려라




세우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 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지 젖는 강기슭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울바위



작약꽃 옆에서 발을 씻는다

송홧가루 날려와 물가에 쌓인다

세상 근심에 여럿이 밤을 지샌 아침에도

울바위 아래 어여쁜 물 무심히 흘러라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렘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고요한 물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봄산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철쭉꽃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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