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저 골목 오르막길

오순도순

거기

가난한 집의 행복이 정녕 행복이니라


*

가던 길 고라니가 

물 속의 달 가만히 바라보네


*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 구멍이 안 보여


*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

모래개펄 지나

아무 말 않고

바다 속

아무 말 않고

아기거북이는 먼 길 가더라


*

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나는 내일의 나를 모르고 살고 있다


술 어지간히 취한 밤

번개 쳐

그런 내가 세상에 드러나버렸다


*

어머니 없는 인간의 때 오리라


동물원

오랑우탄 어미와 새끼

한참 바라보았다



*

내 집 밖에 온통

내 스승이다


말똥 선생님

소똥 선생님


어린아이 주근깨 선생님


*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



*

다시 한번 폭발하고 싶어라

불바다이고 싶어라


한라산 백록담



*

강원도 진부령인가

이 세상의 눈 경치만한 것

또 있겠는가


봄날도 

가을 단풍도

동해 쪽빛도

섭섭함 아니던가



*

천년 내내 손님 노릇하네

하필

수련꽃 위에 앉은 잠자리도 나도


*

온종일 장마비 맞는 거미줄

너에게도 큰 시련이 있구나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팽이가 돈다

어제 미당이 갔다

오늘 우리 동네 오영감이 갔다

어찌 죽음이 하나둘만이리오

어린아이 팽이에 뭇 죽음들이 삥 둘러서 있다



*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녀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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