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집 시학





가을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잦다


어제 밤에 유리창에 들이비친

달빛을 탓했고


그제 밤엔 골짜기 가득 메운

소낙비를 핑계 삼았다


자다가 깨어 문득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때도 있다.



아내



새 각시 

새 각시 때

당신에게서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번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도 모르게

눈을 감곤 했지요


그건 아직도 그렇습니다.





스님이 목탁을 치던 자리


목탁만 남았다가


목탁 소리만

또 남았다가


솔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능소화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떨어지고 마는 어여쁜

눈부신 하늘의

육체를 본다


그것도 비 내리시는 이른 아침


매디매디 또다시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얼핏.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산수유꽃만 그런 게 아니다



이름을 알게 되면

잘 보인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더욱 잘 보인다


그리워하게 되면

못 잊는 그 무엇이 된다


마침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가슴속으로 들어와 꽃으로 바뀐다.



인생



해 저물녘 빈 하늘을

둘이서 바라보는 것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구름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


낯선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이름도 모를 새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는 것


작은 키 긴 그림자 둘이서 데리고

빈방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



하늘 눈빛



두 손을 놓고 나면

흰구름도 볼 만하고

은사시나무,  바람에

몸을 비트는 은사시나무도

봐 줄 만하다


어,  아직도 그 주소에서

살고 있군요

나도 그렁저렁 밥술이나

벌어먹고 지냅니다


햇파 냄새 햇마늘 냄새도

조금 번지면서 연보라 빛

눈물도 찔끔 흘리면서

어디선 듯 내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상쾌



시골 살면서도 꽃 한 포기 가꿀 줄 모르고

풀 한 포기 뽑을 줄 모르는 시골 아이들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학교 처마 밑 좁은 땅에

봉숭아꽃을 심고 학교 실습지 한 귀퉁이에

고구마 순을 묻었다


봉숭아꽃을 심으며 꽃이 피면

손톱에 꽃 물 들여주고

고구마 순을 묻으며 가을 오면

함께 고구마를 캐보자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길길이 뛰면서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떤 아이는

가슴이 상쾌하다고 말했다

상쾌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었을까


아이들 가슴속에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얘들아 반갑다



아침마다 문을 조금씩 열어놓는다

혹시나 유리창에 가려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수줍은 햇빛들도 들어오게 하고

바람이며 새소리도 조금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다


바람을 따라 먼지 같은 것도

덤으로 들어온단들 어떠랴!

들어와 나랑 함께 잠시 놀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될 일 아니겠나?


현관 쪽으로 난 문도 뻥긋이 조금 열어놓는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이들 후당탕거리며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도 조금 들어와

내 마음속에 잠시 머물어 놀다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얘들아, 반갑다

다 반갑다.




서른다섯 살



앓는 사람은 앓는 사람이고

혼자 남아 길고 긴 젊음의 강물을

서럽게 서럽게 건너갈 아내는 어쩔 것이며

두 아이의 초롱같은 눈매는 또 어쩔 것이냐

나이 서른다섯 살

앞날이 창창할 때 구만리 같을 때

세상살이 아직은 잘 알지 못할 때.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나 이미 오래 전에 남의 아버지 되어버린 사람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세상한테 바람맞고 혼자가 되어 쓸쓸할 때

그늘 넓은 나무는 젊은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뻗쳐 나를 감싸주시고

푸르는 산은 이마 조아려 나를 내려다보며

젊은 아버지처럼 빙그레 웃음 지어 보이신다

짜아식 별걸 다 갖고 그러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된다니까

나 머잖아 할아버지 될 입장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철부지 손자거나 아예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흘러가는 흰 구름은 잠시 머리 위에 멈춰 서서

보일 듯 말 듯 외할머니 둥그스름한 얼굴 모습도 

만들어주고

할머니 작달막한 뒷모습도 보여주지 않는가

오빠야 오빠야 때로는 이름 모를 조그만 풀꽃들 

발 뒤꿈치를 따라오며

단발머리 어린 누이들처럼 쫑알쫑알 소리 없는 소리들을

가을 들길에 풀어놓지 않는가

나 세상한테 괄시받고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었을 때

제 풀에 삐쳐서 쪼끔은 쓸쓸할 때.




시인 * 1



아서라, 그대

세상을 위해 살았노라

대신해서 울었노라

큰소리치지 마라


오늘도 그대

스스로를 위해 밥숟갈을 들고

자신의 슬픔과 기쁨 위해

한숨 흘리지 않았던가


부디 그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노여워하지 말고

그대 자신이 세상을 더 잘 알지 못함을 

한탄하라


다만 그대의 흐린 별빛

어두운 밤길 헤매는 


한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고 그의

고달픔을 달래 수 있음만 감사하라.



흐르는 봄날



황사바람 속 흐린 하늘 아래

서둘러 꽃들은 또 한 번 까무러칠 듯 피었다 지고 

신록은 덧칠로 어우러지기 시작하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길거리 헤매다가 혼자서 중국집에 들러

짬뽕 한 그릇 시켜서 먹고 있다

느닷없이 핑그르르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건

국물이 너무 매워서 그런 걸까 뜨거워 그런 걸까

이 짬뽕을 다 먹고 나도 하늘은 여전히 찌뿌둥할 것이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와주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한 거야 자네도 부디 잘 살다 오시게

창 밖에서 누군가 날더러 말을 걸고 싶어한다


거지 같은,  참 걸뱅이 같은 봄날이 

빨리도 흘러간다.



모퉁이 길



혼자 오래 서 있었다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다 싶었던지

바람이 지나가다 물었다

외로우냐고....


한참을 더 있다가

풀꽃 향기가 다가와 물었다

슬픈일이 있냐고....


한참을 또 그러고 있는데 

흰 구름이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며 그윽한 말투로 물었다

가야 할 곳이 마땅치 않냐고...


바람이 지나가고

풀꽃 향기가 스쳐가고

흰 구름이 흘러가고...

그러나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늦은 봄날의 일이었다.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깨달음에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감동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얘기 가운데 한가지다.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다 싶은데 외할머니는

 아주 열심히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그것도 여러 차례

들려주셨다. 암캥이가 빠지면 수캥이가 건져주고 수캥이가 빠지면

암캥이가 건져주고...

우리네 인생살이란 것도 시시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구슬프고 눈물나는 것이 인생살이란 것이겠구나. 

요즘은 나도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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