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들러의 사상은 엉터리입니다. 완전히 속임수예요. 아니,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선생님이 마음대로 신봉하는 건 자유지만, 가능하면 아무 말 마셨으면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리고 어디까지나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아들러를 포기하려고, 오늘 밤 마지막까지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겁니다. - '시작하며' 중에서


과연 아들러의 사상은 엉터리인가?


3년 전 홀가분하고 희망 찬 마음으로 철학자의 서재를 떠났던 청년. 그랬던 그가 '중대한 고민'이 있다며 다시 철학자의 서재를 찾았다. 그 3년 동안 청년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도대체 그의 '중대한 고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들러 심리학을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였다.


원래라면 훨씬 밝고 우호적인 방문이었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논박이니 뭐니 하지 않고 둘도 없는 벗의 한 사람으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떠났던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철학자의 서재를 방문했다. 청년은 과연 어떤 논의를 하고자하는 걸까?    

3년 전 보다 현실적인 고민을 안고 다시 찾아온 청년. 그리고 새로이 '사랑과 진정한 자립'이란 주제로 '이해의 계단'을 준비한 철학자. 다섯 밤에 걸쳐 진행되었던 지난번 논의와는 달리, 이번 논의는 단 하룻밤에 끝난다. 그렇지만 두 사람 간에 벌어진 공방은 더욱 치열하게 이뤄진다.


책의 공저자인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는 당초 후속작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러 심리학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여러 독자들의 질문에 답할 필요성을 느껴 이 책을 썼다고 출간 동기를 밝힌다. 청년의 고민은 바로 독자들의 고민이다. 만약 전작을 읽고 의문을 가졌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런 점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들러 심리학을 적용하는 데서 생긴 오해를 푸는 것도 또 다른 집필 동기다. 이에 '미움받을 짓을 해도 괜찮다'는 그릇된 해석에는 새롭게 '공동체 감각'을 강조, "행복은 공헌감"이라고 규정하며 인간관계에 뛰어들 것을 주문한다. 즉 인생의 주어를 '나'에서 '우리'로 바꿀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자: 내가 냉담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니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논해야 할 것이 없으니 흘려듣는 것이지. 설령 내가 '나쁜 그 사람'이나 '불쌍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거 참, 힘들었겠군" 혹은 "자넨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동조하면 잠깐 마음은 편안해지겠지. 카운슬링 받기를 잘했다, 이 사람에게 털어놓기를 잘했다, 하고 만족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래서 내일부터 매일이 어떻게 달라질까? 다시 상처받으면 위안을 받고 싶지 않을까? 결국 그것은 '의존'이 아닐까? ......그렇기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는 걸세.

청년은 앞으로를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먼저 전제가 되는 '지금까지'를 알아야 된다고 그 필요성을 거론한다. 아마도 누구나 이렇게 답할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철학자는 '눈앞에 있는 자신을 알면 그걸로 충분'하므로 과거를 알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 난 여전히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 인생의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한다

철학자: 칸트가 한 말을 소개하지. 그는 자립에 관해 이렇게 말했네.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도 용기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 책임 하에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성년 상태'란 진정한 자립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칸트가 말한 '이성'이란 지성은 물론 감성까지 포함한 '능력' 전반을 가르킨다. 사실 우리들은 능력의 부족보다는 능력을 발휘하는 용기가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미성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칸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


'나'라는 용기


철학자: 칭찬받는 것을 통해서만 행복을 실감하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더 칭찬받기'를 바라네. 그 사람은 '의존'의 지위에 처한 채로 영원히 갈구하는 삶을,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즉 자신의 가치를 남이 인정하는 것은 의존이다. 반면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정하는 것이야말로 '자립자립'이다. 다라서, 행복이란 남이 만들어주고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정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누군가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사람은 자립할 수 없다"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평범해질 용기'가 부족한 탓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특별한 존재가 아닐지라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된다. 타인과의 차이를 강조하지 말고 평범한 자신을 '나는 나'라는 것에 가치를 둬야 한다.


청 년: 사회의 탄생, 그것은 즉 '고뇌'의 탄생입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충돌, 경쟁, 질투, 고독, 심지어 열등감 등 다양한 고뇌에 직면합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불협화음이 울려 펴집니다. 이제 그 포근하고 따뜻한 양수 안에 있던 고요한 나날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시끌벅적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다고요.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고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결국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철학자는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해서 타인과 관계를 끊으면 고민이 해결이 될까? 타인을 멀리하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산다고 해결이 될까?"라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쁨 또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광활한 우주에 혼자 산다면 고민이야 없겠지만 기쁨 또한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단조로운 삶인가 말이다. 행복의 정의는 바로 이 말에 숨어 있는 셈이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 알프레드 아들러



인생의 주어를 바꾸자


철학자: 이기적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이타적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닐세.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네. 

'나'와 '너'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우리'라고 철학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선택에 있어서 이 순서는 꼭 지켜진다고 강조한다. '나'의 행복을 우선하지 않고, '너'의 행복에만 만족하지 않는, 결국 '우리' 두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음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이다.

이는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이타적인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이기심과 이타심 모두 있는 게 아니라 이 둘 모두 물리치는 것이다. 인생의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 태어난 후 우리는 줄곧 나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나의 귀로 소리를 듣고, 나의 행복을 바라며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나'였던 인생의 주어는 '우리'로 변하네. 이기심도 아니고 이타심도 아닌 전혀 새로운 지침 아래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전작이 지도라면, 이 책은 나침반이다 

이 책은 아들러의 사상을 실천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걷도록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다. 즉 목표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행동 지침이다. 전부터 아들러는 오해받기 쉬운 사상가였다. 특히. '용기 부여'라는 접근 방식을 양육, 교육, 인재 육성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식의 다른 의도로 소개되면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러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혁명의 현실을 목격하고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실망한다. 그리고 정치 개혁이 아닌 교육 개혁을 통해서 인류를 구하기로 방향을 튼다. 오스트리아 빈에 진정서를 넣어 공립학교에 세계 최초로 아동상담소를 설립했다.

그가 생각한 교육이란 학력을 향상시키거나 문제아를 교정시키는 식의 차원이 아니다. 인류를 전진시키고 미래를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교육이었다. 그는 공동체에 사는 모든 사람이 교육할 수 있고 또 교육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아들러를 배우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디었다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또 다른 한 발을 내딛기를 거듭해야 한다. 이 책을 나침반으로 삼아서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지 못한체 <미움받을 용기2>를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다행인것은 전작을 읽어보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전작 <이움받을 용기>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면, <미움받을 용기2>는 행복으로 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루는 책이라 한다. 독특했던 점은 책의 구성이었다. 딱딱하게 나열되어 있는 책이 아니라, 철학자와 청년의 논박을 통해 아들러의 사상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해보게 되어 재미있었다. 청년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많을 것이다. 아들러의 사상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기계발서적에서 이는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사상이나 생각, 이론등을 들었을땐 의지가 불타오르고 할 수 있을것만 같고, 하기만 하면 다 잘될것 같은데, 막상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이는 이내 실망감과 함께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믿었던 이론이나 사상에 불신하게 되고, 청년처럼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의문을 해소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청년은 나보다 한단계 앞섰던 것 같다. 나는 아들러의 사상을 접했지만, 청년처럼 이 사상이 실천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들러의 비결정론적 인간관에 공감하며,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진 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그랬기에 책을 읽으며 나는 좀 더 깊게, 아들러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청년이 제기하는 의문과, 철학자의 현답을 들으며 삶과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더랬다.

아들어의 사상이 속임수이며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청년. 그 청년의 의문에 답을 해주는 철학자. 철학자는 책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아들러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이다. 진정한 아들러를 알고 싶다면 사랑을 알라고 말하는 철학자. 철학자는 청년에게 이야기했다. 청년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전부 사랑이라는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이다. 당연히 청년은 철학자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논의는 시작된다.

책은 크게 다섯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1장에서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읽어본 독자라면 많이 접해보았을 내용들이 나오는데, 아들러 심리학을 통해 나를 좀 더 돌아보게 만드는 장이다. 청년이 처음 철학자를 찾아왔을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할때 아들러의 사상을 접목시켰다가 낭패를 본 이야기를 꺼냈더랬다. 그래서인지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아들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려주는데, 청년이 제기했던 의문들을 나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더 철학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존경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박혔더랬다. 프롬이 이야기 하기를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라고 한다. 더불어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p50)이라 한다. 즉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존경이란 단어의 의미는 프롬이 이야기하는 의미와 다를 것이다. 청년 역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자신이 아는 존경이란 자신도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 동경과도 흡사한 감정을 말한다고 말이다.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존경을 마음이 우러나서 하고 실천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청년 역시 아들러 사상이 실천하기 힘든 이상론이라며 열을 내지 않던가. 그렇지만 철학자는 철학자답게 차근차근 현답들을 제시한다. 물론 그 현답이 바로 듣고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그 무언가가 남아 있어 간질거리는데...그럴때마다 청년 역시 의문을 제기하며 그렇게 청년과 철학자의 논박은 이어진다.

2장에 이르러서는 청년이 처음 제기했던 의문 '칭찬하지도 야단하지도 말라'는 의미를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다. 더불어 상과 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시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아들러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공감하면서 가장 공감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년이 처음 제기했던 상벌에 관한 것이었다. 아들러는 상벌을 금한다. 칭찬해서도 안되고 야단쳐서도 안된다니. 그럼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 아들러의 이 사상을 이야기하면 많은 학부모와 선생님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켄 블랜차드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는데, 아들러는 칭찬을 하지 말란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는데 책을 읽다보니 왜 그런말을 했는지 이해는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물론 이해를 할뿐 완전히 공감되었던건 아니지만 말이다.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본다. 철학자는 문제행동의 5단계를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아들러의 사상을 아이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니 나역시 혼란스러웠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다행스러운것은 청년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일부는 공감하고 일부는 해소하지 못한 의문으로 계속해서 논박해 가니 말이다. 가려운 것을 자꾸만 긁어주는 청년을 보고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에 빠져들었던 시간이다.

세번째 장에서는 앞장에서 해소되지 않았던 '칭찬'에 관한 부분들이 좀 더 언급된다.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좀 더 잘하고 싶은 의욕도 넘쳐나게 만든다. 그런데 왜 아들러는 칭찬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주장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경쟁 때문이다. 철학자의 말을 듣고 보면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생각해보게 되어 깨달음을 주지만, 반면 모호함도 공존하게 되어 점 점 더 아리송한 기분이 드는것만 같았다.

네번째 장, 다섯번째 장에서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아들러의 심리학 서적을 그리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사상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철학자의 의문이 곧 나의 의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논박을 보며 나는 의문이 해소되길 갈망했다. 결론적으로 일부는 해소되었고, 또 일부는 물음표로 남아 머릿속에서 맴돈다. 하지만, 초반 사람들이 아들러를 오해하고 있으며, 아들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오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아들러가 말하는 것에 가까이 다가오게 된것 같아 의미있었다. 아들러의 사상에서는 사랑과 존경이 깔려 있었다. 더불어 인간관계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 시간이었다.

철학자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고 '지금 여기'라는 일상에 큰 결단이 필요하다고. 그 시련을 피해가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p236)고 말이다. 4장에서 이야기하는 주어야 받을 수 있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하게 된 시간이었다. 더불어 신뢰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과 자립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의미와 조금은 달랐지만, 그랬기에 많은 것을 생각해본 시간이 되었다.

많은 자기계발서적들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들때가 있다. 청년처럼 말이다. 이거 '속임수 아니야' 하는. 아들러의 사상 역시 그랬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거 탁상공론에 그치는 사상이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철학자와 청년의 논박을 보며 나처럼 가려운 부분이 일정 해소될지도 모를테니. 이론만 접하고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 하다. 재미있고 생각도 깊어진 시간이었다.






우리는 누구나가 보다 나은 방향을 추구한다. 그것이 오답이고 오해일지라도 우리는 다시금 정답과 이해를 추구한다. 이렇듯 미완성된 존재이기에 우리는 늘 보다 나은 삶과 완성된 존재로서의 모습을 추구한다. 신이 아니기에, 우리는 펼쳐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저마다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설령 실수를 반복 할지라도 말이다. 이렇듯 다시 도전하고 결단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는 적극적인 철학자의 냄새가 난다. 그 모습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성실해 보인다.

<미움받을 용기2>도 마찬가지다. 아들러심리학이라는 사상에 기초하여 철학적 질문과 답으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 그 안에는 오답을 통해 정답에, 오해를 통해 이해에 근접해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회의와 고민들을 추가로 반영한 점이 특별히 눈에 띈다.

아들러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신’, ‘현재’, ‘우리’와 같은 것들이다. 현재에 충실하며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보단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더 발전하여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협력에 기초한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나’에서 시작되어 ‘우리’로 귀결되는 아들러심리학의 내용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익에 기초한 이해관계보단 신뢰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전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에 대한 핵심적 가치를 ‘사랑’에 두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2>는 사랑과 존중, 공동체 관계의 배경을 교실상황으로 설정했다. 가르침의 장(場)이자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의 상황을 토대로 가정, 지역사회 공동체 관계로의 확장을 모색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론적인 부분보다는 실제적인 측면, 활용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용의 전반에서는 독자들에게 지금의 ‘자신’을 인식하고 교실상황에서 느끼는 바를 반영하여 ‘협력’의 원리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협력에 기초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쌓아올려 자립의 길에 이르기를 권한다.

교육환경에 접목시킨 아들러심리학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그 시작은 ‘과제의 분리’에 있다. 교육이란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과제에 충실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조력자이자 보조자이고,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과제를 완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러심리학에서는 지시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은 결국 학습자에게 문제행동만을 남기게 된다고 말한다. 지금의 교육상황과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과거 주입식 교육의 폐단을 인식하였고,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과 창의력 향상을 위한 교육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의 교사는 학생들의 꿈과 끼를 최대한 발산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작품에서는 현행의 학교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처럼 학생들이 자립하고,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존재로서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스스로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자립’에 이르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아들러심리학의 목표 4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3. 내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4.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여기서 교사 혹은 부모의 역할은 조력자, 안내자, 보조자로서의 카운슬러일 것이다. 저자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은 곧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공감할 것’을 제시한다. 타인의 관심사에 나 또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존경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들러심리학의 중심개념이자 난해하기 그지없는 ‘공동체 감각’. 철학자는 이것을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공감이라는 기술이 필요하고, 공감의 첫걸음은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 p.69


책에서는 교실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행동의 목적을 5단계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칭찬요구, 주목끌기, 권력투쟁, 복수, 무능의 증명’이 그것이며 교사는 학생이 3단계인 권력투쟁을 넘어서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칭찬과 벌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교사는 재판관이 아니며 학생 스스로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생 행동의 목적이 칭찬을 받기 위함 혹은 벌을 피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목적이 바뀌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협력원리에 기초한 운영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수직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쟁보다는 수평관계를 바탕으로 한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이러한 수평적 관계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을 ‘공동체 감각’이라고 표현했다. 미숙한, 불완전한 존재의 개인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방법으로 관계와 유대를 추구하게 되며, 그 관계의 장(場)이 ‘공동체’라는 것이다. 앞선 문제행동들 또한 이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나타내는 잘못된 행동일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 혹은 자녀들에게는 진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가 인정하는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결말에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쌓아올리는 것이라 말한다. 둘 이상이 함께 쌓아 올리는 사랑, 그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은 ‘우리’를 보게 되고, 나에게만 한정짓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립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자립은 곧 개인으로써의 홀로서기가 아닌 공동체 관계에서의 함께 서기일 것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개인에서 시작되어 우리를 인식하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아들러심리학이 전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곧 ‘존중’, ‘공감’, ‘사랑’일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현재의 상태에 주목하여 관계를 인식하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자립의 길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거나 해결할 문제가 있으면 심리학 책을 읽는다. 읽다 보면 내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나 겪는 문제인 걸 알게 되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위안이 된다. 문제는 위안이 되는 건 책을 읽을 때만이고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싫은 사람은 계속 생기고 불편한 관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대체 왜일까?


2015년 최고의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후속편 <미움받을 용기2>도 이 점을 지적한다. 3년 전 희망찬 마음으로 철학자의 서재를 떠났던 청년이 철학자를 다시 찾아온다. 그동안 중학교 교사가 된 청년은 아들러 심리학을 활용해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청년이 아들러 심리학을 이해할 순 있어도 실천하긴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아들러의 사상을 접하고 당장 감격해서 "사는 게 편해졌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들러를 크게 오해하는 걸세. 아들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제 내용을 알게 된다면 그 어려움에 몸이 움찔할 테니까." (p.15) 사는 게 편해졌으면 해서 아들러 심리학을 찾았는데 오해라니. <미움받을 용기>에서 놓친 아들러 심리학의 실제 내용이 뭐길래 그럴까.

어떤 인간도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탄한 인생을 살진 않아. 누구나 슬픈 일도 겪고, 좌절도 하고, 이가 갈릴 정도로 분통 터지는 일을 당하기도 하지. 그렇다면 왜 과거에 겪은 비극을 '교훈'이나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까지도 그 일을 털어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이는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네. 그 과거를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거지.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비극이라는 안주에 취해서 불행한 '지금'의 괴로움을 잊으려는 것이지. (p.79)

아들러 심리학의 대표적인 특징은 '목적론'과 '공동체주의'다. 인과론이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고 보는 반면, 목적론은 결과에 맞춰 원인을 상정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책을 읽거나 카운슬링을 받으며 심리적 안정을 추구해도 현실의 불만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과는 거리가 먼 '지금의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온통 잿빛으로 칠"한다. '그런 학교에 다닌 탓에', '그런 선생이 있었으니까'라고 자책하는 사람은 '만약 이상적인 학교에서 이상적인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나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가능성 속에서 산다. 과거가 상처투성이라서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현재에 불만족하기 위해 과거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인간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도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의 관점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쁜 건 타인이고 나는 죄가 없다고 변명하며 남들에게 위로를 구하고 그들의 관심 속에 안주한다.   

예를 들어 주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의 이런 면이 싫어." "저 사람의 이런 점을 참을 수 없어"라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네. 그러고 나서 한탄하지. "아아, 나는 운도 없지. 참 인복도 없어." 그 사람이 정말 인복이 없는 것일까? 아닐세. 절대 아니지. 친구 복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친구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거라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거지. (중략)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라고 했던 아들러의 말을 떠올려보게. 그러면 어떤 상대라도 '존경'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네. 그것은 환경이나 대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네의 결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 (p.217)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는 '존경'과 '신뢰'를 제시한다. 여기서 존경은 '자신도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 동경과도 흡사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존경이 아니라 공포이고 종속이고 맹신'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존경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는 것'이다. 타인을 조종하거나 교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아이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친구와 놀기만 한다고 타박할 것이 아니라, 친구와 어떤 놀이를 하고 무엇이 재미있는지 아이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뢰'도 마찬가지다. 신뢰는 근거나 대가를 요구하는 '신용'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믿고 어떤 결과가 벌어지든 책임을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것이다. 이게 과연 쉬울까. 쉽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철학자가 "아들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제 내용을 알게 된다면 그 어려움에 몸이 움찔할 테니까." 라고 말한 모양이다.

나를 버리고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타인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게 현대 사회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나부터도 실천할 엄두가 안 난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이 책에서 해답을 구한다는 건 자신을 무조건 믿어주고 받아들여줄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는 반증일 터. 그 중 한 사람에게라도 무조건적인 존경과 신뢰를 쏟을 수 있다면 그 사람뿐 아니라 내 인생도 보람되고 행복할 것 같다(그는 과연 어디에...?).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거나 해결할 문제가 있을 때 심리학 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아무래도 나한테 지금 절실한 건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사랑받을 용기, 아니 사랑할 용기인 듯하다.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질문을 던지며 뿌듯할 때가 있다. 나름 의식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생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묻고 답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름 인생의 참 의미를 실천하는 것 같아 만족하기도 하고. 행복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정말 잘 사는 것일까 등. 생각해 보면 그 말은 곧 내가 그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닐까. 늘 불행하기에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집착했고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 행복에 나도 한 번쯤 느껴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던 아들러의 심리학 내용을 담았던 책 <미움받을 용기>의 새로운 이야기가 <행복해질 용기>라는 주제로 독자들과 만난다. <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용기 있는 삶을 선택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 아들러의 가르침 대로 잘 살고 있을까. 저자는 전작을 '지도'에, 이 두 번째 책을 '나침반'에 비유한다. 지도만 있다고 인생의 항해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이 책이 용기 있는 삶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저마다 본능에 충실한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난다. 교육과 사회 적응을 통해 본능대로가 아닌 보다 나은 욕구를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두발로 걷고, 뛰고, 말을 배우고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며 생산적인 일에 참여하고 창조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하며 무기력한 상태에서 자립해 나아간다. 여기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고, 분업과 사회 유지, 공동체 감각이 보다 나은 사회로의 이행을 돕는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란 신체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지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느 수준일까? 깊이 따져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는 상하 위계질서에 입각한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수평적 관계라기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가깝다. 가정에서 부모는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일거수일투족 아이들의 삶에 개입한다.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회에서도 이 논리가 고스란히 적용된다. 나이에 따라 위아래가 엄격하게 구분 지어지고 남녀 간의 업무 분리 세대 계층 간의 갈등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인간 이해에 대한 현주소를 들여다보며 아들러의 심리학을 어떻게 응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타인에 대한 공헌 감에서 행복을 찾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진 성숙한 인격체로 나아가기까지 여전히 그 거리는 명백해 보인다. 여전히 우리의 최대 가치는 경제적 부에 지배당하고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따위 관심 없어 보인다. 오히려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는 것을 우리는 오히려 낯설게 여기게 된 듯하다. 저자는 시간도 노력도 들이지 않고 폭력에 의존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쉽다고 말한다.


"폭력에 의존하면 시간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밀어붙일 수 있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지. 폭력이란 어디까지나 값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네. 폭력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인간으로서 너무 미숙한 행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네"

_본문 125쪽

여전히 세계의 반은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하고 힘들어하고 고통받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해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고무적인 것은 그 인간의 가치는 결코 이기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의 눈으로 세계를 보던 것에서 탈피하여 타인을 향하고 타인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라고 한다. 나 혼자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살자고 외친다는 것이다.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바꿀 수 있어.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꾸어주지.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네."

_본문 267쪽

인생의 주어를 바꾸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바꾸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조금씩 실천해 나갈 때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지 않을까. 이 이론이 백 퍼센트 맞다던가 너무 엉뚱하다던가 하면 논하기 앞서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보고, 이미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를 때 이미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가지 않을까 바라본다. 머지않은 미래에  각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파크/후기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라클모닝  (0) 2018.07.13
불행 피하기 기술  (0) 2018.07.13
오리지널스  (0) 2018.07.12
전략의 신  (0) 2018.07.12
작은 가게의 돈버는 디테일  (0) 2018.07.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