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트 민음사
걸어 보지 못한 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 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자작나무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걸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본일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오색 찬란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듯한 햇빛은 그것들을 녹여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그 부서진 유리 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허물어져 내렸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말라 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비록
한번 휜 채 오래 있으면
다시 꼿꼿이 서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세월이 지나면
머리 감은 아가씨가 햇빛에 머리를 말리려고
무릎 꿇고 엎드려 머리를 풀어 던지듯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 사태가 나무를 휘게 했다는 사실로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데리러 나왔던 아이가
나무들을 휘어 노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기어오를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찰찰 넘치게 채울 때 그렇듯
조심스럽게 기어오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발이 먼저 닿도록 하면서,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내린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 주면서 나를
이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 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불과 얼음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 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 본 욕망에 비춰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들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 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할 만큼
나는 증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충분하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
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
그 떡잎은 꽃이지만,
한 시간이나 갈까.
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
새벽은 한낮이 된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겨울에 일락조를 찾으며
서산 노을은 저물어가고
공기는 차가워지는데
휜 눈 밟으며 집으로 가면서
새 한 마리 나무에 내려앉는 걸 본 것 같다
여름에 이 곳을 지나면서
나는 발을 멈추고 쳐다봐야 했다.
새 한 마리 천사 같은 목소리로
달콤하고 빠르게 노래하고 있었으니.
지금 거기서 노래하는 새는 없다.
가지에 고엽 하나 달려 있을 뿐,
나무 주위를 두 번 맴돌아도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 위에 있는 나로서는
그 맑은 냉기가
눈 위에 서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마치 금 위에 도금을 한 것같이.
푸른 하늘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붓으로 어설프게 그은 양
구름인 듯 연기인 듯한 게 걸려 있고
그 사이로 작은 별 하나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은 한낮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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