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집 시학





가을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잦다


어제 밤에 유리창에 들이비친

달빛을 탓했고


그제 밤엔 골짜기 가득 메운

소낙비를 핑계 삼았다


자다가 깨어 문득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때도 있다.



아내



새 각시 

새 각시 때

당신에게서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번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도 모르게

눈을 감곤 했지요


그건 아직도 그렇습니다.





스님이 목탁을 치던 자리


목탁만 남았다가


목탁 소리만

또 남았다가


솔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능소화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떨어지고 마는 어여쁜

눈부신 하늘의

육체를 본다


그것도 비 내리시는 이른 아침


매디매디 또다시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얼핏.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산수유꽃만 그런 게 아니다



이름을 알게 되면

잘 보인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더욱 잘 보인다


그리워하게 되면

못 잊는 그 무엇이 된다


마침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가슴속으로 들어와 꽃으로 바뀐다.



인생



해 저물녘 빈 하늘을

둘이서 바라보는 것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구름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


낯선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이름도 모를 새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는 것


작은 키 긴 그림자 둘이서 데리고

빈방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



하늘 눈빛



두 손을 놓고 나면

흰구름도 볼 만하고

은사시나무,  바람에

몸을 비트는 은사시나무도

봐 줄 만하다


어,  아직도 그 주소에서

살고 있군요

나도 그렁저렁 밥술이나

벌어먹고 지냅니다


햇파 냄새 햇마늘 냄새도

조금 번지면서 연보라 빛

눈물도 찔끔 흘리면서

어디선 듯 내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상쾌



시골 살면서도 꽃 한 포기 가꿀 줄 모르고

풀 한 포기 뽑을 줄 모르는 시골 아이들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학교 처마 밑 좁은 땅에

봉숭아꽃을 심고 학교 실습지 한 귀퉁이에

고구마 순을 묻었다


봉숭아꽃을 심으며 꽃이 피면

손톱에 꽃 물 들여주고

고구마 순을 묻으며 가을 오면

함께 고구마를 캐보자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길길이 뛰면서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떤 아이는

가슴이 상쾌하다고 말했다

상쾌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었을까


아이들 가슴속에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얘들아 반갑다



아침마다 문을 조금씩 열어놓는다

혹시나 유리창에 가려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수줍은 햇빛들도 들어오게 하고

바람이며 새소리도 조금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다


바람을 따라 먼지 같은 것도

덤으로 들어온단들 어떠랴!

들어와 나랑 함께 잠시 놀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될 일 아니겠나?


현관 쪽으로 난 문도 뻥긋이 조금 열어놓는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이들 후당탕거리며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도 조금 들어와

내 마음속에 잠시 머물어 놀다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얘들아, 반갑다

다 반갑다.




서른다섯 살



앓는 사람은 앓는 사람이고

혼자 남아 길고 긴 젊음의 강물을

서럽게 서럽게 건너갈 아내는 어쩔 것이며

두 아이의 초롱같은 눈매는 또 어쩔 것이냐

나이 서른다섯 살

앞날이 창창할 때 구만리 같을 때

세상살이 아직은 잘 알지 못할 때.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나 이미 오래 전에 남의 아버지 되어버린 사람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세상한테 바람맞고 혼자가 되어 쓸쓸할 때

그늘 넓은 나무는 젊은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뻗쳐 나를 감싸주시고

푸르는 산은 이마 조아려 나를 내려다보며

젊은 아버지처럼 빙그레 웃음 지어 보이신다

짜아식 별걸 다 갖고 그러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된다니까

나 머잖아 할아버지 될 입장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철부지 손자거나 아예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흘러가는 흰 구름은 잠시 머리 위에 멈춰 서서

보일 듯 말 듯 외할머니 둥그스름한 얼굴 모습도 

만들어주고

할머니 작달막한 뒷모습도 보여주지 않는가

오빠야 오빠야 때로는 이름 모를 조그만 풀꽃들 

발 뒤꿈치를 따라오며

단발머리 어린 누이들처럼 쫑알쫑알 소리 없는 소리들을

가을 들길에 풀어놓지 않는가

나 세상한테 괄시받고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었을 때

제 풀에 삐쳐서 쪼끔은 쓸쓸할 때.




시인 * 1



아서라, 그대

세상을 위해 살았노라

대신해서 울었노라

큰소리치지 마라


오늘도 그대

스스로를 위해 밥숟갈을 들고

자신의 슬픔과 기쁨 위해

한숨 흘리지 않았던가


부디 그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노여워하지 말고

그대 자신이 세상을 더 잘 알지 못함을 

한탄하라


다만 그대의 흐린 별빛

어두운 밤길 헤매는 


한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고 그의

고달픔을 달래 수 있음만 감사하라.



흐르는 봄날



황사바람 속 흐린 하늘 아래

서둘러 꽃들은 또 한 번 까무러칠 듯 피었다 지고 

신록은 덧칠로 어우러지기 시작하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길거리 헤매다가 혼자서 중국집에 들러

짬뽕 한 그릇 시켜서 먹고 있다

느닷없이 핑그르르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건

국물이 너무 매워서 그런 걸까 뜨거워 그런 걸까

이 짬뽕을 다 먹고 나도 하늘은 여전히 찌뿌둥할 것이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와주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한 거야 자네도 부디 잘 살다 오시게

창 밖에서 누군가 날더러 말을 걸고 싶어한다


거지 같은,  참 걸뱅이 같은 봄날이 

빨리도 흘러간다.



모퉁이 길



혼자 오래 서 있었다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다 싶었던지

바람이 지나가다 물었다

외로우냐고....


한참을 더 있다가

풀꽃 향기가 다가와 물었다

슬픈일이 있냐고....


한참을 또 그러고 있는데 

흰 구름이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며 그윽한 말투로 물었다

가야 할 곳이 마땅치 않냐고...


바람이 지나가고

풀꽃 향기가 스쳐가고

흰 구름이 흘러가고...

그러나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늦은 봄날의 일이었다.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깨달음에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감동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얘기 가운데 한가지다.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다 싶은데 외할머니는

 아주 열심히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그것도 여러 차례

들려주셨다. 암캥이가 빠지면 수캥이가 건져주고 수캥이가 빠지면

암캥이가 건져주고...

우리네 인생살이란 것도 시시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구슬프고 눈물나는 것이 인생살이란 것이겠구나. 

요즘은 나도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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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저 골목 오르막길

오순도순

거기

가난한 집의 행복이 정녕 행복이니라


*

가던 길 고라니가 

물 속의 달 가만히 바라보네


*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 구멍이 안 보여


*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

모래개펄 지나

아무 말 않고

바다 속

아무 말 않고

아기거북이는 먼 길 가더라


*

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나는 내일의 나를 모르고 살고 있다


술 어지간히 취한 밤

번개 쳐

그런 내가 세상에 드러나버렸다


*

어머니 없는 인간의 때 오리라


동물원

오랑우탄 어미와 새끼

한참 바라보았다



*

내 집 밖에 온통

내 스승이다


말똥 선생님

소똥 선생님


어린아이 주근깨 선생님


*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



*

다시 한번 폭발하고 싶어라

불바다이고 싶어라


한라산 백록담



*

강원도 진부령인가

이 세상의 눈 경치만한 것

또 있겠는가


봄날도 

가을 단풍도

동해 쪽빛도

섭섭함 아니던가



*

천년 내내 손님 노릇하네

하필

수련꽃 위에 앉은 잠자리도 나도


*

온종일 장마비 맞는 거미줄

너에게도 큰 시련이 있구나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팽이가 돈다

어제 미당이 갔다

오늘 우리 동네 오영감이 갔다

어찌 죽음이 하나둘만이리오

어린아이 팽이에 뭇 죽음들이 삥 둘러서 있다



*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녀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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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





교훈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 세상이기에

참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하였다

이유 없는 투정을 누구에게 부려 보겠느냐

성미가 좀 나빠도 내버려 두기로 한다



無題



설움이 구름같이

피어날 때면

높은 하늘 파란 빛

쳐다봅니다


물결같이 심사가

일어날 때면

넓은 바다 푸른 물

바라봅니다



연정



따스한 차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친구를 잃고



生과  死는

구슬같이 굴러간다고


꽃잎이 흙이 되고

흙에서 꽃이 핀다고


영혼은 나래를 펴고

하늘로 올라간다고도


그 눈빛 그 웃음소리는

어디서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전해 들은 이야기



잔주름져가는 눈매를

그녀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이제는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그런 사위움도 아니오

중년부인이란 말이 서운하여서도 아니다

그녀를 그렇게 슬프게 하는 것은

세월도 어찌하지 못하는,  언제나 젊은 한 여인이 남편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이 봄



봄이 오면 칠순

고목에 새순이 나오는 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연못에 배 띄우는 아이같이

첫나들이 나온 새댁같이

이 봄 그렇게 살으리라




만남




그림 엽서 모으며

살아왔느니


쇼팽 들으며

살아왔느니


겨울 기다리며

책 읽으며-

고독을 길들이며

살아온 나


너를 만났다

아 너를 만났다.




고백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 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기억만이




햇빛에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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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종환 문학동네



오늘밤 비 내리고




오늘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알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사월 목련




남들도 나처럼

외로웁지요


남들도 나처럼

흔들리고 있지요


말할 수 없는 것뿐이지요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것뿐이지요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월 목련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사랑을 하면서도 잎 지는 소리에 마음 더 쏠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흩어지는 산향기에 마음 더 끌려라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나는 소쩍새 소리에 마음 끌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사라지는 별똥 한 줄기에 마음 더 쏠려라




세우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 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지 젖는 강기슭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울바위



작약꽃 옆에서 발을 씻는다

송홧가루 날려와 물가에 쌓인다

세상 근심에 여럿이 밤을 지샌 아침에도

울바위 아래 어여쁜 물 무심히 흘러라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렘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고요한 물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봄산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철쭉꽃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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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 문학동네



그 시절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들듯 시들어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그 시절 시들듯 그도 시들어갔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사람



어디 없는가

모가지째 떨어지는 붉은 동백같이

일생에 단 한 번 하얗게 꽃 피우고 죽어버리는 대나무같이

늘 푸른 마음을 가진....




오래된 숲2



 바람이 숲을 지날 때 나무도 풀도 떨어진 잎새까지도 봄을

구부려 우우 소리내어 웁니다 숲은 오랜 무료함에서 깨어나

잊었던 몸짓을 다시 생각해내는 듯 몸을 떱니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만....


 숲은 고요에서 깨어나는 일이 귀찮아도 그로써 숲임을 확

인합니다 태양은 따스함으로 비는 빗물로 바람은 떨림으로

그리고 어둠은 고요한 쉼으로 생명을 주고 키우며 그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부단히 누군가를 상관하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상관하려 들 것입니까 사랑이

없다면 땅도 비도 눈도 바람도 햇빛도 그리고 마음도 없는 황

량한 죽음뿐일 것입니다




외로운 식량



이슬만 먹고 산다 하데요

꿈만 먹고 산다 하데요


그러나 그는 밥을 먹고 살지요

때로는 술로 살아가지요

외로움을 먹고 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

사실은 외로움만 먹고 살아가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이지요



예쁜 꽃



이제 더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봄편지



안녕하십니까.

미황사입니다.

잘 계시지요?


동백이 많이 피었습니다

매화도 피었고요.

문득 한번 내려오시지요.

.....



봄의



 부스스한 얼굴이다.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났다.  헝클어

진 머리칼 새로 빈 까치집도 보인다.  설 쇠러 간 까치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들에 울긋불긋 아롱거리는 것은 꽃이 아니

다 아니다. 꽃이다.  봄꽃! 이른 봄 들에 피는 사람꽃.

 아직 매화는 피지 않았다.   첫 달거리 맞은 가시내 젖꼭지

마냥 몽글몽글하다.  막 벙그러질 참이다. 지난 겨울 화단 모

퉁이에서 내내 꽃대만 세우고 있던 상사화도 다시 생각을 들

어올리는 중이다 언덕바지에 가시내 몇 위태롭게 봄풀을 뜯

고 있다.  갓 물을 올린 보리밭 이랑,  들판으로 번져나갈 기세

다. 아직은 졸리운 이른 봄 들판.




산령을 넘으며




거기에 그런 고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람 세차고

높은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이미 지나가 잘 닦여진 깊은 산속

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거기에 있었다 한 고개만 넘으면 드넓

은 바다로 나가는 깊은 산과 바다가 그렇듯 가까이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니....

 가파르게 살아온 삶에 무심했듯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는 고개 또한 무심하다 나는 지금껏 그러한 곳이 있다는 것

도 모르고 살아왔다 고갯마루에 올라 가쁜 숨을 멈춘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저편의 풍경을....



가을밤



마음도 이쯤 되면 서언할 것이다 깊을 것이다

향기도 없는 풀꽃 한 송이 한가로이 피워낼 것이다

밤하늘에 피어나는  별꽃들 더욱 초롱할 것이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시월 보름달,  저 홀로 불그스레 이울어갈 것이다

풀벌레 소리도 그친 적막의 시간.

건듯 부는 바람에 몸을 떠는 풀잎의 이슬



절름발이




그대를 기다렸네.

이미 늦은 줄 알지만.

날 부축해 갈 수 없냐고

전화를 했네.


그대는 끝내 오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절룩거리며

아픈 다리 끌고 가네.


정처 없는 길을 가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지만

더이상 날 부축할 이,

이제 세상에 없을 것이니


봄꽃, 

저 홀로 피었다 지듯 

오직 나 혼자뿐!



옻나무



남도 어디쯤 길을 가네

벼 이삭 노랗게 익어가는데

산빛 여전히 푸르른데

꽃단장하고 수줍게 숨어 있네


-조심해라,  옻 오를라


가까이해선 안 될 것들은

가시를 키우든 독을 품든 하네

다가설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화려한 분장에 쉬이 빠지느니....


나는 가슴에 깊은 흔적을 하나 가지고 있네

뻗신 장미꽃 가시에 찔린,  혹은

멋모르고 다가가 어루만지다가 오른 옻자국



꽃도장



그 가시내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학길 울긋불긋 코스모스

길 따라 코스모스처럼 웃으며 재잘대며 집으로 가던 가시내

빠알간 코스모스 꽃모가지 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살금살

금 다가가 새하얀 교복 등짝에 차알싹 꽃도장 찍으면 깜짝 놀

라 화난 얼굴로 뒤돌아보며 초롱한 눈 이쁘게 흘기던 가시내

등에 찍힌 꽃도장 보며 달아나며...... 너는 이제 내 각시다

속으로 좋아라 어쩔 줄 몰라 흰 교복에 번질세라 등에 찍힌

꽃도장 털지도 못하고 꽃 같은 입으로 궁시렁 궁시렁 욕바가

지 쏟아내다가 피식 웃어버리던 가시내 꽃 모양도 선명한 코

스모스 꽃도장 등에 박고도 코스모스같이 웃던 가시내 지금

은 어디에 있을까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그 가시내 오늘 문

득 코스모스길을 가다 생각이 나네



DNA



못 끊어

끊을 수 없어

끊는 즉시 사망이야

살아도 죽음이야


장마철 방구들 뒹굴다

손을 뻗으면, 거기 그대 있어

불현듯 그 짓이나 하고 싶어라

심심풍리 심심초

생각 사라 사념초

깊이 들이마신 연기처럼

생각도 깊어 푸르러라


칼칼한 소리

잔소리인 양 흘려버리다가도

싱긋 웃으며 다가서고 싶은 그대

전폐에 숨 헐떡이듯

가슴 깊이 그대 물기에 젖어

그 속,   나,  헤어나지 못하네



치자꽃 피는 밤



늦여름 매미 한 마리 시원하게 울고 간 다음 사과밭에는

사과가 뚝뚝 떨어져 쌓였다 윗마을 조씨는 매미가 울기 시작

하자 그놈 잡는다고 온종일 소리를 쫓아다니다 저녁 무렵에

야 잔뜩 불쾌해진 얼굴로 돌아와 무논밭 나락처럼 쓰러졌다


물의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치자나무 휘몰아치는 바람에

도 아랑곳없이 하얀 꽃잎 마구 피워올리더니.... 소주병 뒹

구는 건넌방 처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방 총각 훔쳐보고 있

다 냄새인 듯 향기인 듯 코끝 맴도는 페로몬향 가득 떠다니

는 밤




散骨을 하며

-어머님께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맑습니다

산색 더욱 푸르러 여름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집을 한 채  지어주셨으나 저는 당신에게 산집

한 채 지어드리지도 못합니다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물러 고단하고 싫증이 났을 터이므로

저는 당신을 훠이 훠이 풀어드립니다


더러는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십시오

더러는 주린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가 먼 땅에 다시 태어

나십시오

더러는 빗물에 씻겨가 물색 산천어와 노니십시오

더러는 나무와 풀도 기르십시오

그리고 더러는 꽃으로 피어 가을날 저희들 찾아오는 길 따

라 손을 흔들어주십시오

당신은 꽃을 많이 기르고 싶다 하셨지요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



당혹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

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적막한 귀가



[매너모드] 3월 10일 월요일 오후 열시 삼십팔분 오늘 하

루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에

행여 들리지 않을까 진동으로 해놓고 온종일 들고 다니면서

혹 손떨림을 느끼지 못했을지 몰라 가끔씩 들여다보았지만

[부재중 전화]  표시는 없었다 누구도 전화하지 않은 거다 아

무도 날 찾지 않은 것이다 어디에요 언제 들어올 거에요 하다

못해 그런 전화마저도 없었다


젊은 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돌아다닐 때 버스에서 만난

한 여자가 물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

데요 혼자 다니면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할까..... 혼자는 외

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

른다....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싶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오늘도 참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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