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가에서




강바닥 모래알 스스로 도는

진주 남강 물 맑은 물같이는,

새로 생긴 혼이랴 반짝어리는

진주 남강 물빛 밝은 물같이는,

사람은 애초부터 다 그렇게 흐를 수 없다.


강물에 마음 홀린 사람 두엇

햇빛 속에 이따금 머물 줄 아는 것만이라도

사람의 흐르는 세월은 

다 흐린 것 아니다,  다 흐린 것 아니다.


그런 것을 재미삼아 횟거리나 얼마 장만해 놓고

강물 보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심사로

막판엔 강가에 술집 차릴 만한 세상이긴 한 것을

가을날 진주 남강 가에서 한정 없이 한정 없이 느껴워 한다.




과일가게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 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연애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정릉 살면서




솔잎 사이사이

아주  빗질이 잘 된 바람이

내 뇌혈관에 새로 닿아 와서는

그 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을 잘해 보라 일러주고 있고.....


살 끝에는 온통

금싸라기 햇빛이

내 잘못 살아온 서른여섯 해를

덮어서 쓰다듬어 주고 있고.....


그뿐인가,

시름으로 고인

내 肝臟안 웅덩이를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

말갛게 씻어주며 흐르고 있고.....


친구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이 눈물 나게 넘치는 자산을

혼자 아껴서 곱게 가지리로다.




한 명창의 노래에서




소나무 잔가지에 어리는 바람

그 소슬한 음처럼 임이여

나도 그대에게 그렇게 닿아가고 싶다.


그러나 이는

여든살 로도 안되는 꿈

아,  그래서

살이 묻은 피가 묻은

내 재산 이목소리

갈아오던 肝臟

송두리째 찢어서 뽑아서

몸부림으로 바쳐 노래하노니.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신 아리랑



바다 두고 산을 두고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백 리 바깥을 보는

네 산처럼 아득한 눈을 어찌하고,


내 잘못을 거울처럼 받아 비추는

물 같은 이마를 어찌하고,


복사꽃 피는 앵두꽃 피는

정다운 동네어귀 입술을 어찌하고,


우거진 숲이여

네 시원한 머리카락을 어찌하고.


아,  어찌하고 어찌하고

고향의 능선 젖가슴을 어찌하고,


바다 있기에 산이 있기에

사랑이여,  너를 버릴 수는 없을지니라.




사람이 사는 길 밑에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울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어지간히 구성진 노래 끝에도 눈물 나지 않던 것이 문득

머언 들판을 서성이는 구름 그림자에 눈물져 올 줄이야.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 마음 그림자는,  드디어 마음에도 등을 넘어 내려오는

눈물이 아니란 말가.

-문득 이 도령이 돌아오자,  참 가당찮은 세월을 밀어버리어,

천지에 넘치는 바람의 화안한 그림자를 춘향은 눈물 속에 아로새겨

보았을 줄이야.         -<바람 그림자를> 춘향이 마음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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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집 민음사





달팽이 뿔 위에서




사방천지에 잠자는 짐승의 숨소리들이,  세상 가득 상처

난 식물의 코 고는 소리가,  그들이 뱉어놓은 눅진눅진한,

짙은 입 냄새가,  들숨,  날숨,  부풀어오르다 꺼지는 뒷산

의 어깨가,  눈 맑은 꽃,  까칠까칠한 턱,  내 손으로 감쌌

던 두꺼운 손,  늘어진 머리카락들,  길처럼 여린길,  발처

럼 예쁜 발,  코끼리 발자국 속에 무수한 개미 발자국,  흙

속에 묻어둔 사나운 발톱,  바람 한 장에 꿀 한 숟갈,  이

슬을 털다 스스로 놀라는 잎갈나무 숲,  달처럼 해진 달,

물처럼 환한 물,  이윽고 별들의 정수리가 다아 보일 때

나는,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시인 지렁이씨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황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

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진달래 시첩



진달래 바람에 봄 치마 휘날리더라

저 고개 넘어간 사랑마차

소식을 싣고서 언제 오나

그날이 그리워 오늘도 길을 걸어

노래를 부르느니 노래를 불러

앉아도 새가 울고 서도 새 울어

맹서를 두고 간 봄날의 길은 멀다

-이난영,  <진달래 시첩>


스무살 나이엔 봄바람의 설렘을 알았고

서른 살 나이엔 꽃 지는 설움을 알았는데

마흔이 가까워오니 꽃 피는 장관에

눈이 감아지더라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듯

꽃망울 맺히는 모양에 내가 아픈데

아가리를 좍좍 벌리고

비를 받아먹는 여린 잎들이여


우중에 한껏 부풀어오른 야산을 관망하니

산모처럼 젖이 아프더라


쌀독을 들여다보아도

냉장고를 들여다보아도


국그릇을 들여다보아도

배가 고파서 배가 부르더라


여자가 쓰는 물건들은 

왜 하나같이 움푹 패어 있어

무언가 연신 채워 넣도록 생겨먹었는지

이 혹독한 봄날에야

대답을 찾아간다


몽중에 온갖 소원 다 이룰 만치

큰 잠을 잤더라



십일월의 여자들



보기에 좋고 불편한 속옷은 

벌서 오래전에 장롱 서랍 깊이 넣어두었다

그걸 다시 꺼내 입을 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 집을 나서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해마다 여행 가방은 부풀어올랐다

떠날 수가 없었다


길게 늘어난 그림자도

나이가 들어 있었다

영락없이 얇고 흐릿했다


바람이 불면 미치도록 펄럭이다 

식량을 담으면 봉긋하고 얌전해지는

구멍가게 비닐봉지와도 같았다


싸가지가 없다고 어린 딸을 때리던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어 있었고


딸에게 의지하여 딸이 된 엄나는 그러나

싸가지가 없을수록 눈물겨웠다


망치는 있고 못이 없었던 시절을 지나와서

이제는 온몸 모서리가 못 자국으로 헐어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서 배운 바대로

아내가 베를 짜는 밤을 엿보지 않는 남자와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어디든 간에

몸을 덮어두기 위해 입는 이옷을

벗어 걸어두는 데가 모두 집이기를 바랐다


-나를 안고 싶으니.

그럴때 말고 바로 이럴 때.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당신의 혀를 노래하다



넘실대는 목젖.  손을 정갈하게 씻고 혀끝을 들춘다.  혀

밑에 수천 마리 벌 때.  시끄러운 소릴 내며 날아오른다.

어떤 노여움.  어떤 집요함.  어떤 막무가내.  어떤 결핍감.

어떤 거부감.  어떤 난감함.  어떤.  뜨겁고 건조한 떨림.

그리고 스밈.  습자지 같은 눈빛.  습자지 같은 찢김.  짜릿

한 아림.  쓰림.  그렇지만 알싸한 휘발.  묵직하게 남은 그

림자.  발밑 수북한 벌 떼의 시체들.  한 그릇의 꿀. 





너의 눈




네 시선이 닿은 곳은 지금 허공이다

길을 걷다 깊은 생각에 잠겨 집 앞을 지나쳐 가버리듯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꿰뚫고,  나를 지나쳐서

내 너머를 너는 본다

한 뼘 거리에서 마주보고 있어도

너의 시선은 항상 지나치게 멀다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너를 보고 있으면서도

내 뒤를 느끼느라 하염이 없다


뒷자리에 남기고 떠나온 세월이

달빛을 받은 배꽃처럼

하얗게 발광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너의 눈에

나는 걸어 들어간다


그안에서 다시 태어나 보리라

꽃 피고 꽃 지는 시끄러운 소리들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숨어 살아보리라




일요일



식어가는 차와

차 한 잔의 경건함

테이블  50cm  폭의 광활함

각설탕처럼 쟁여 있는 창밖 햇살


보이진 않지만 바람의 거센 호흡

허리가 굽은 행인

그 손엔 검정 비닐봉투의 악다구니


고단한 바람의 광기

나무들의 헤드뱅잉

그 안에 갇힌 구관조 한 마리

무덤이 될 수 없는 날개

그 날개를 얹고 날기만 하는 새


겨울 외투의 무게

두 눈 속에는 핏발

냉장고에 넣어둔 들꽃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말

향기를 지워가는 지우개의 희히ㅡ낙락

가고 오지 못하는 질문과 대답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 전구

감전되는 나무들

혀로 핥아주는 상처

담배 한 모금

바람 두 모금




순도




함박눈이 저렇게 허공을 메우며

한없이 내리는 것을 보노라니

허공이 비어 있을 때보다도 더

허해 보인다

눈이 온다는 사실이 나리라

허해 보이는 허공 때문에

눈물이 나려는 것이다

저리도 황활한 허공이

이리도 빽빽한 지상을

눈여겨보라며

눈을 내려 보낸다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본 자의 지독한 외로움을 더 지독하게 하려고 

눈은 밤을 새워

제 눈물을 꽝꽝 얼린다




기일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기도도 듣지 않는다 한다

죽은 이들의 기도만 듣는다 한다- 김종삼의 시 <벼랑바위> 중에서



산 자들이 날마다

순교하며 스러져가는 태양의 모퉁이

몸을 뒤척이며 잠은 들게 마련




가족사진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젋고 환한 아버지 이마 아래.  그 눈빛 닮은 아들이 있

었고,  그 튼튼한 한쪽 다리 위에 큰딸이 앉아 있었고,  고

운 어머니 품에는 막내딸이 있었다

플래시가 터졌을 때,  토끼처럼 두 눈을 똥그랗게 뜬 다

섯 식구


아버지 칠순을 맞아 또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분홍 한복만이 고운 어머니 옆에 어디를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는 검은 아버지가 계시고 , 큰딸과 막내딸은 벽지처

럼 무늬를 그리고 배후에 서있다 옆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 창문 하나,  창문 밖에는 박제된 여름이 있다


두 장의 가족사진 번갈아 바라보다.  잠든 부모 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불의 능선이 야트막하다 작게 부풀어오

르다 내려앉는 능선의 속삭임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에미 애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리워하면서 그

리워 하면서



적막과 햇빛사이



아주 잠깐은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이 방에 찾아온 손님

차 한 잔을 내와서 마주않는다


후박나무가 잎사귀 흔들며 따갑게 퍼덕인다  줄기를 기

어가는 작은 발 개미 하나 그 뒤에 또 하나 또 하나 발발

거리는 발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하나

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시를 썼을까

술 마시느라 밤을 새운 매월당 김시습

헤어지며 드리는 시를 썼을까

홍랑 매창 옥봉 그녀들도

이런 시간에

고요해서 다 들리는 이 시간에

적막해서 다 보이는 이 시간에

껴안았을 때에만 느껴지는 당신의 맥박처럼,  덜컥덜컥

희미하게 다가오는 문산행 기차와 형광등에게 필사적으로

가닿았다  까맣게 내려앉은 하루살이들과 1억 5천 킬로미

터를 직진으로 달려오는 햇빛과


침묵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찻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새벽이 크나큰 손을 뻗어

죽어가던 한세상 눈꺼풀을 마저 덮어준다


햇빛이 난간에 매달린 적막을 떼어낼 때 세상이 살아

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  떨어지며 절규하는 적막 덕뿐에

고막이 터진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저달은 웃으리.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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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시집 민음의시 민음사





새벽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부치지 않은 편지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폭풍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날으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봄눈




나는 그대 등 뒤로 내리는

봄눈을 바라보지 못했네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대 텅빈 가슴의 말을 듣지 못했네

새벽은 멀고

아직도 바람에 별들은 쓸리고

내 가슴 사이로 삭풍은 끝이 없는데

나는 그대 운명으로 난 길 앞에 흩날리는

거친 눈발을 바라보지 못했네

용서 받기에는 이제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

다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사막처럼 엎드린 그대의 인생 앞에

붉은 무덤 하나

흐린 하늘을 적시며 가네

검정고무신 신고

봄눈 내리는 눈길 위로

그대 빈 가슴 밟으며 가네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새벽에 아가에게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은 있는가 보다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은 있는가 보다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퀴 같은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아직 없나니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지라도

아가야 하늘에는 거지별 하나




가을편지



너는 침묵할 때 간절히 기도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진실로 사랑했는가


마음 착한 이들의 분노를 위해

그립고 푸른 하늘의 위해


너는 침묵할 때 죽음을 생각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어머니가 그리웠는가


가을바람 불어와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흐르던 강물조차 흐르지 않는

이 가을 눈부신 햇빛 속에서


너는 홀로 침묵의 들꽃으로 피었는가

너는 홀로 침묵의 저어새로 울었는가




산성비를 맞으며




산성비를 맞으며

모란이 핀다


오늘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해가 저문다


슬픈 까마귀는 날아서

어디로 가나


살아가는 분노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드디어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위하여


산성비를 맞으며 피어나는

모란을 바라보며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 밥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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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민음사





참으로 아름다운 5월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꽃봉오리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네.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새들이 노래부를 때,

나의 그리움과 아쉬움

그녀에게 고백했네.




연꽃<밤과 달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낭만적 서정시로서 슈만의 작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연꽃은 찬란한

햇님이 두려워,

머리 숙이고 꿈꾸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달님은 그녀의 연인,

달빛이 비쳐 그녀를 깨우면,

연꽃은 수줍게 얼굴을 들고

상냥하게 님을 위해 베일을 벗는다.


연꽃은 피어 작열하듯 빛나며

말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향내음 풍기며 사랑의 눈물 흘리고

사랑의 슬픔 때문에 하르르 떤다.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  애타게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때 세상은 그래도 다사로웠고,

사람들은 한가롭게 살아갔었지.


허나 이제 모든 것은 뒤바뀌어,

이곳에는 혼잡!  저곳에는 궁핍!

천상에서는 하느님이 돌아가셨고,

지상에서는 악마가 거꾸러졌다.


하여 모든 것은 참을 수 없이 음울하고,

헝클어지고 썩어 문드러지고 차갑게만 보인다.

이제 한 조각 사랑마저 없다면,

어디에 발 붙일 곳이 있으랴.





비극 1





나와 함께 도망가서 나의 아내가 되어,

내 가슴에 기대어 편히 쉬어라.

머나먼 타국에서는 나의 가슴이

너의 조국이고 아버지의 집이다.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죽고,

너는 혼자서 외롭게 되어,

네가 비록 아버지의 집에 있다 해도,

타국에 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언




저녁 어둠 다가오고

물결은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데

나는 해변에 앉아

파도의 하얀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고

너를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스런 너의 모습,

그 모습 어디를 가나 나의 주변을 떠돌고,

어디를 가나 나를 부른다.

어디서든지,  어디서든지

바람소리 속에서도,  바닷소리 속에서도,

그리고 내 가슴의 탄식 속에서도,


가느다란 갈대를 꺾어 나는 모래에 썼다.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심술궂은 파도들

이 달콤한 고백 위로 몰려와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꿈과 삶




낮은 휘황하게 빛났고,  나의 가슴은 타올랐다.

말없이 마음속에 나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밤이 왔을 때,  나는 남몰래

조용한 곳에 피어 있는 장미에게로 갔다.


무덤처럼 소리없이 침묵하며 나는 다가갔다.

눈물만 빰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장미의 꽃받침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눈부신 빛과 같은 것이 밖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즐겁게 장미나무에서 잠들었다.

그러자 익살맞은 꿈이 장난을 쳤다.

나는 장밋빛 소녀의 영상을 보았고,

장밋빛 코르셋으로 덮여진 가슴을 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예쁜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황금빛으

로 부드러운 무엇인가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곧 조그만 황금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 집에는 모든 것이 놀랍게 다채로웠고,

멋있는 원을 그리며 많지 않은 사람들이 빙빙 돌아

갔다.


거기에는 열두 사람이 끝없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춤이 한 곡 끝나려 하면,

다른 춤이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무도곡이 나의 귀에는 이렇게 울려왔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느니,

너의 모든 삶은 하나의 꿈에 불과할 뿐,

그리고 이 시간은 꿈속의 꿈이려니.>-


그 꿈은 지나갔고,  아침이 밝아온다.

나의 눈은 재빨리 장미를 바라본다,_

오 슬프다! 빛나는 작은 섬광 대신

장미의 꽃받침 속에는 차가운 벌레가 한 마리 숨어

있다.





무슈<하이네가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돌보아준,  하이네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절망적이었던 마지막 사랑> 를 위하여




너는 꽃이었다,  사랑하는 소녀야,

키스만 하여도 나는 너를 알 수 있었지.

어느 꽃의 입술이 그렇게 보드랍고,

어느 꽃의 눈물이 그렇게 뜨거우랴!


나의 눈이 감겨 있어도,  나의 영혼은

언제나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마주보았지,  행복하고 황홀하게,

그리고  달빛을 받아 요정처럼 빛나며!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네가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들었지_

우리가 한 말은 아무 부끄러움도 아니고,

침묵은 사랑의 순결한 꽃이려니.


소리없는 대화! 남들은 거의 믿지 않겠지,

말없이 사랑만이 오가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즐거움과 전율로 엮어진,  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속에 어찌하여 시간이 그리도 빨리 흘러

가버리는지를.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결코 묻지 마라! 처

라리

개똥벌레에게 물어보라,  왜 풀숲에서 반짝거리는지를,

물결에게 물어보라,  왜 개울에서 졸졸 흐르는지를,

서녘바람에게 물어보라,  왜 윙윙 불어오는지를.


물어보라,  루비에게,  왜 빛나느냐고,

물어보라,  꽃무와  장미에게,  왜  향기를 풍기느냐

고-

하지만 결코 묻지 말라,  무엇 때문에 고뇌의 꽃과

사자가

달빛 아래 애무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 서늘한 대리석 궤짝 속에서 졸며

아름다운 기쁨의 꿈을 누렸는지를.  아,  이제

내 조용한 안식의 기쁨은 스러져버렸다!


오 죽음이여!  무덤에 깃드는 그대의 정적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환희를 줄 수 있다.

어리석고 거친 삶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정열의 경

련과 안식 없는 쾌락을 주었거니.


                  .......................................



드디어 죽음이 온다-   이제 나는 말하리라,

영원히 침묵하기 전에

자랑스럽게.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나의 심장은 너를 위하여 뛰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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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다시 읽는 천 년의 시  민음사







그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돕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슬픔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백두산 천지에서-

-정채봉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 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 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 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꿈꾸는 세상

-장사익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베풀며 나누는 따스한 세상

맑은 물 흐르고 푸른 산 드높은

그런 세상 꿈을 꾸며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구름이 오면 구름을 타고

바람 불면은 바람을 따라

멀리멀리 높이 높이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그 꽃

-고은




내려갈 대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동천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기어 가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으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

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

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

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

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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