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 시집 민음사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

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

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

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

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

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

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

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개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커피를 쏟다





산의 한쪽 어깨가 날아가 버린 날.  난 그저 통조림 뚜껑

을 였었고,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 그

들과 나의 폐활량 차이를 궁금해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몇

개의 산맥을 넘어가 버린 날도 난 그저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을 뿐입니다.  다 세월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뿐 지나가 버린 일입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

히는 일이나 후진하다 담벼락을 들이받는 일조차 원래 일

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


나는 언제나 내 강물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강물을 보고


그나마 세월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것만 겨우 알았을 

뿐입니다.

원래 일어날 일들이었습니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슬픈 빙하시대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

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

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

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

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

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달리기





두 발로 선 대신 뇌가 무거워졌습니다.  수백만 년 전의

대가.


처음엔 삶의 한 풍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고,  그다음엔

저기에 사랑이 있다고 해서 달렸습니다.  신념이나 욕망 같

은 것들을 어깨에 얹고 달렸습니다.


곡선주로를 빠져나온 그 어느 날 이것저것 다 빼면 달리

기만 남았습니다.  성채를 지을 것 같았던 신념도 내 것이

아니었고,  기름기 잔뜩 밴 욕망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

보니 사랑도 없었습니다.


달리기만 남았습니다.

한 사람이 불현듯 자유롭습니다.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

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

라며 시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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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집 민음사




바늘의 무렵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

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

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

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을 찾

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

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마침내 아주 작은 책이 되어 버린 어떤  '무렵'




이 책의 효과는


눈을 감고 있으면

누구나 잠시 후 자신이 바람이 된다는 걸 알기까지


눈을 감은 채

나는....... 바람이....... 된다......

라고

자신의 눈에게 속삭일 때까지


눈을 감고

당신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한 번만 생각해 보아라


그대여 잘 흘러가고 있는가


그곳이 어디든 

바람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이제 눈을 뜨면

누구나 자신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바람의 시차라고 생

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눈이 되어 바람이 돌아올 즈음


무용수의 발처럼


눈을 감은 채

누구나 자신의 무덤 속에 한 번은 누워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음역이다




종이로 만든 시차3

-종이연



좋은 연을 만들기 쉬해서는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좋

은 바람을 상상할 줄 아는 것이 먼저다.


연은 일단 손을 떠나기 시작하면 바람과 가장 닮은 시

간을 찾고 바람이 멀리서 듣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옮기고

있는 느낌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연을 실로부터 풀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이 바람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기다리면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바람이 연을

데려간다.  연날리기란 바람과 연 사이에 '긴 현' 을 놓아

주는 것에 불과하다


공책 한 권을 앞에 놓고 이것을 종이비행기로 바꿀 것인

가,  종이배로 바꿀 것인가의 갈등이 우리가 지금까지 날리

고 있는 연의 항해이다.  그 시차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어

딘가로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는 일이 허공에 쌓

이고 있는 하나의 사회로 우리가 드나드는 일이듯이,  시란

질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선을 믿어야 한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연처럼, 

그 시차에 서명한다.




"진정한 여행자들은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이다." 


   - 보들레르.<여행> -


"여행의 언어는 시차이다. ...... 여행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시차를 겪다가 오는 일종의 경험인데, 그 경험의 끝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시차를 겪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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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송 시집 창작과 비평사




담 터 (강원도 철원군 금악산 계곡에 위치한 궁예 성터, 현재 성터는 페허가 되어있다)



남기지 못한 유언들

담터 개울가 여기저기 굽은 닥나무로 무성하다

유언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동티 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붉은 빛으로 감시하고 있다


짐승처럼 어둠의 결을 밟으며

궁예를 좆아 담터 가는 길

이름 없는 마을을 지날 때는 두고 온 가족의 이름으로

이름을 지어줬다


회나무골 이모집 뒤뜰 장독대의 늙은 장독처럼 빈 담터

장정들은 궁예의 눈짓에

꼬리 대신 몸을 흔들었고

그 몸짓에 어린것들은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액이 빠져버린 담낭 안으로 궁예가 몰고 들어온 사람들

제 스스로는 알 수가 없었던 거짓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진실

천년간 묵혀 장맛을 들였다


시대의 눈빛을 피해

지금 담터를 찾아든 쓸개빠진 사람아

너를 감시하는 빛이 어떤 빛인지를 아느냐





중랑천 뚝방길



중랑천 뚝방을 걷는다

볼이 얼어오는 게 시원하다

장이 녹아내리면 이만큼 시원해질까


녹천에서 장안까지

바람에 녹는 위액들이 검다

시대를 살면서 흘린 피가 저리 검다면

살아가야 할 날들은 얼마나 만흔 피를 어떤 색으로 흘려야 하나


중랑천 뚝방은 혼자 걸어야 한다

냄새를 풍기며 세상을 억류하는 사람만 걸어야 한다

함께 못 가 미칠 듯이 가슴속에 뭉친 사람아

그대 죽음 위로 내리는 서리

하얗게 빛난다


그리움은 방향을 잡으면 사라지는 것일까

김포에서 왔는지 한무리의 갈매기

공중을 휘돌아 새벽처럼 서리처럼

검은 물위로 내렸다


그대 날아 앉은 새벽

뚝방에서 봄과 겨울은 갈리었다




골짜기에 부는 바람 맞으로 산으로 갔다




산만큼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할 얼굴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때,  나는

저녁 골짜기에 부는 바람을 맞으러 산에 간다

골짜기에는 살아온 만큼의 무게를 지닌

낙엽들이 온몸 촉촉이 젖은 채 썩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들은 뒤척이고

낙엽이 뒤척일 때마다 삶이 상해서 풍겨대는 냄새,  냄새는

공복을 그리워하는 소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패부를 찌른다

시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냄새보다

삶이 상해서 풍기는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을 느낄때다

가슴 골짜기에서는

숨어 있던,  햇볕을 덜 맞고 자란,  먼저 상했던 잎들이

냄새를 반기고 있는 것 같다


냄새 때문에 바람이 노니는 게 보인다





무수골의 겨울




날이 남서쪽으로 기우니

좌판처럼 널브러진 마음이 추슬러졌다


해가 우이암에 걸리니

어느 시골 읍내 이발소에 걸려 있던 촌스런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땅에서 어둠이 나오니

검푸른 하늘의 별처럼 근심이 또렷해졌다


객토를 끝낸 논에서 그 사람 냄새가 났다






침엽수의 봄




한파를 피해서 집 떠난 사람

지루한 겨울잠에서 도망나온 도마뱀

바람처럼 빈집을 훑고 떠나면서 남겨둔 잡도둑들의 가슴 두근거림

장작을 패던 모탕 위에서 졸고 있다

나른한 겨울햇살을 등에 지고

저 공중에 정지한 새매

산수유는 언제 물을 빨기 시작할까

살벌한 균형에 사로잡힌 침엽수의 봄

6백년 전 벗어던졌던 갓을

6백년간 새로 짜대는.....

겨울 빛에 마른 고욤은 더이상 떫은 냄새를 풍기지 않을 것이다



무건리*

에는 갓이 있다



*무건리- 삼척군 도계읍 산중에 있는 화전부락.  공양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던 여말 유신들이 화전민으로 정착하면서 갓을 벗어

던졌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현재 아홉 채의 너와집에 그 후예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겨울 한파를 피해서 부락을 떠났다가 이듬해 봄에 부락으로 돌아오는데,  그 기간 동안 농기구나 골동품을 도둑맞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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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민음사





그대 잠을 깨라.  어느새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낸 후

술탄의 성탑에 햇빛을 내리쬔다


아침의 허망한 빛이 사라지기 전

주막에서 들려오는 저 목소리,

<사원에 예배 준비가 끝났거늘

어찌하여 기도자는 밖에서 졸고만 있나>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 짧디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성현들과 더불어 지혜를 씨부리고

내 손수 공들여 가꿔봤지만

마침내 거둔 것은 다음 한마디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어쩌다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물처럼 세상에서 속절없이 흐르다가

사막의 바람처럼 세상을 하직하고

어디론지 속절없이 가고만 있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나?

부질없는 것일랑 묻지 말게나

한 잔,  또 한 잔, 금단의 술

덧없는 인생을 잊게 해주리


너와 나의 이야기도 오직 잠시뿐이런가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

그것을 밝혀볼 등잔을 찾아

두 손 들어 어둠 속을 헤매었으나

밖에서 들리는 그 한마디는 <눈먼 너속의 나>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대고 속삭이는 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전,  한번 가면 못오리>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두려워 마오,  삶을 끝막는 죽음

어찌하여 그대와 내게만 있을쏜가

거품 같은 삶을 빚는 영원한 사키

앞으로도 쉴 새 없이 거품 빚으로


그대와 내가 함께 장막을 지나가도

이 세상은 오래오래 살아 남으리

바닷물에 밀리는 조약돌 인생

머물다 간다 한들 아는 체할 세상인가


잠시동안 머물며 덧없이 맛보노니

사막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삶이로다

보라,  허무에서 태어나 허무로 돌아가는

저 유령 같은 대상,  오 서둘러 살자


반짝했다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인데

벗이여,  삶의 비결 찾느라 인생을 보낼 건가

허위와 진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말해 보오,  무엇에 의지하여 일생을 사나


허위와 진실이 종이 한 장 차이라면

그렇소, 알리프 한 자가 비결이 되오

그 쉬운 비결만 찾아낸다면

갈 수 있으리,  보물 집으로,  하늘나라로


창조물의 핏줄 속에 수은처럼 흐르면서

인간 고통 외면하는 은밀하신 하나님

만물 속에 그 모습 드러내면서

온 세상이 변화해도 그분은 남네


이것인가 하는 순간 어둠 속에 파묻히니

장막 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 연극,

손수 지은 연극을 연출하며 지켜보니

하나님은 영원히 심심풀이하시나


딱딱한 대지를 굽어봅이나

열리지 않는 하늘 문을 헛되이 바라봄도

오늘 그대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이니

내일이면 그대마저 있지 않으리


이런 노력,  저런 논쟁,  시간을 낭비 말라

부질없는 추구야 허망하기 짝이 없다

쓴맛 나는 열매 먹고 슬픔 참느니

잘 익은 포도주로 즐거워하라


벗이여, 푸짐한 술상을 차려 놓고

새 장가 들던 나를 기억하는가

불모의 이성일랑 침실에서 몰아내고

포도 넝쿨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지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흐르는 세월을 헤아릴 수 있음도

내 수학적 계산의 덕분이라 하지만,

별것 아닐세,  태어나지 않은 내일과

사라진 어제를 달력에서 찾았을 뿐


신성할쏜 포도주는 하늘의 열매

누가 감히 그 넝쿨을 함정이라 모독하랴

마시자,  이 축복을 어찌 마다 할쏜가

그게 만약 저주라면 누가 거기 놓았으랴


이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제

죄 많은 몸 지옥 갈까 두렵다 해서

하늘나라 술 기약에 눈이 멀어서

이승의 삶의 묘약 저버릴쏜가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어둠의 문 거쳐간 이 무수히 많았건만

갔던 길 되돌아와 겪었던 일 고하는 이

한 사람도 없다 하니, 어찌 아니 이상한가

그 길을 알려거든 우리 몸소 가야 하리


경건한 자,  유식한 자,  우리 앞에 나타나서

이러쿵 저러쿵 닥쳐올 일 밝히지만,

믿지 못할세라,  그건 모두 잠꼬대

예언을 마친 그들 잠자리도 다시 드네


저승이 어떠한지 지레 짐작해 보려고

볼 수 없는 세계 속에 내 영혼을 보냈더니

이윽고 돌아온 영혼,  이렇게 답을 했네

<내 자신이 천국이요,  지옥일러라>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우리 모두 기껏해야 환등속의 허깨비

삶의 극을 연출하는 하나님께서

한밤중에 빛을 내는 태양등 켜면

줄을 지어 극을 하는 허깨비들


낮과 밤이 엇갈리는 장기판 위에

하나님이 놀며 두는 힘없는 말들,

이리저리 옮기면서 장군 멍군 찾다가

하나씩 죽어서는 골방으로 들어가네


타구장의 공 처지에 가타부타 있을쏜가

치는 이의 뜻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갈 뿐,

우리들을 이 세상에 몰고 오신 분

그분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리


운명을 기록하는 신의 손가락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기록을 찾네

기도나 잔꾀로야 한줄이나 지울쏜가

눈물로 호소한들 한마디나 씻을쏜가


하늘이라 부르는 뒤집힌 그릇,


그 아래 갇혀서 살다 죽는 인생인데

손을 들어 하늘에 구원을 찾지 말라

어차피 하늘인들 아무 힘이 없는 것을


진실로 참회의 맹세 자주 했건만

그 맹세 하면서 내 정신이 맑았던가?

봄 여인이 장미꽃 손에 들고 나타나면

닳아 빠진 참회야 산산조각 깨어졌네


포도주야 못 믿을쏜,  이 몸을 배반했고

명예의 의상을 이 몸에서 벗겼지만

알지 못할세라,  세상에 그 어떤 값진 것이

포도주 상인들의 상품을 당할쏜가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 혹은 seize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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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택시집 문학동네




만화방창


내안

어느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웠습니다






그대

앞에서




방창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홍매



깜박 속았지

한낮에 붉은 입술

캄캄했어

눈 떠보니

가만히 닿던

그 서늘함

흔적이 없었지

꿈이었지

한낮의 꿈

붉은 너의 입술

산을 열고

도를 열고

흙담을 나와

너는 

내 마음속

가장 어둔 곳에

살짝 치껴뜨는 속눈썹 같은

한 송이 꽃이었네




남쪽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환장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앉아 놀다가

한줄기 바람에 날려 흐르는 물에 떨어져 멀리 멀리 흘러 가버리든가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오래오래 

앉아 놀다가 산에 잎 다 지고 나면 늦가을 햇살 받아 바삭 바삭 바스라지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리둘이 똑같이 물들어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버리든가



마른 장작



비 올랑가

비 오고 나면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면 꼭 좋겄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겄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봄비




비가 오네요

봄비지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앞강에 물고기들 오르는 소리에

문득 새벽잠이 깨었습니다







새 울고 

비 오네

빗소리 속에

새 울고

그대 그립네

가을이 이렇게 와서

새소리처럼 머물다가

가네 

새소리 

따라가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삷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들어

꽃,

다졌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며 햇살을 쏟아냅니다 눈이 부시네요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지요

차들이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늘 보던 풍경이 때

로 낯설 때가 있지요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지요 어디만

큼 오고 있을 그대를 생각합니다 그대가 오는 그 길에 찔레꽃

은 하얗게 피어 있는지요 스치는 풍경 속에 내 얼굴도  지나가

는지요 참 한가합니다 한가해서,  한가한 시간이 이렇게 아름

답네요 그대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생각하다가 나는,  무슨 생각이 났었는지,  혼자

웃기도 하고,  혼자 웃는 것이 우스워서 또 웃다가, 어디에선지

 불쑥 또다른 생각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생각을 이을 필요

도 없이 나는 좋습니다 이을 생각을 버리는 일이 희망을 버리

는 일만큼이나 평화로울 때가 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

뭇잎이 흔들립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서 그대를 기다릴

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지나 갑니다 아! 산다

는 것,  사는 일이 참 꿈만 같지요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내가 내 편이 아닐 때에도 당신은 내 편이었지요

어디만큼 오셨는지요 차창 너머로 부는 바람결이 그대 볼

을 스치는지요 산과 들, 그대가 보고 올 산과 들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갑니다 기다릴

사랑이 있는 이들이나, 기다리는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

들은 행복합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도

세상도 저기 가는 저 수많은 차와 사람들도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사랑은 어디서든 옵니다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색다른 사랑이 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



작은 찻잔을 떠돌던 노오라 산국차 향이 아직도 목젖을 간질입니다

마당 끝을 적시던 호수의 잔물결이 붉게 물들어 그대 마음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렸지요

지금도 식지 않은 달콤한 꽃향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모르겠어요

온몸에서 번지는 이 향이

산국 내음인지 당신 내음인지

나 다 젖습니다



첫사랑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쌍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봄날은 간다




진달래


염변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

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 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성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치라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

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

은 다 같니라




무심한 세월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잉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낙화유수



머리가 허연 할머니 한 분이 마을에서 걸어나와 옷을 입은

채 강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허연 머리끝까지 강물에 다

잠기고,  연분홍 산복숭아꽃 이파리 한 장이 물 위로 떠 오른

다 꽃잎이 일으킨 물결이 강기슭에 닿을 때,  강굽이를 돌아가

던 꽃 이파리가 마을을 잠깐 뒤돌아본다


햇살이 고운 봄날이다




이십일 년 전



나하고 사니라고 애썼네이인

사는 것이 참 금방이구만

사는 것이 바람 같은 것이여

머리맡에 앉은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아버지는 자기의 일생을 그렇게 정리하셨다


이십일 년 전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눈길 가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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