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송 시집 창작과 비평사
담 터 (강원도 철원군 금악산 계곡에 위치한 궁예 성터, 현재 성터는 페허가 되어있다)
남기지 못한 유언들
담터 개울가 여기저기 굽은 닥나무로 무성하다
유언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동티 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붉은 빛으로 감시하고 있다
짐승처럼 어둠의 결을 밟으며
궁예를 좆아 담터 가는 길
이름 없는 마을을 지날 때는 두고 온 가족의 이름으로
이름을 지어줬다
회나무골 이모집 뒤뜰 장독대의 늙은 장독처럼 빈 담터
장정들은 궁예의 눈짓에
꼬리 대신 몸을 흔들었고
그 몸짓에 어린것들은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액이 빠져버린 담낭 안으로 궁예가 몰고 들어온 사람들
제 스스로는 알 수가 없었던 거짓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진실
천년간 묵혀 장맛을 들였다
시대의 눈빛을 피해
지금 담터를 찾아든 쓸개빠진 사람아
너를 감시하는 빛이 어떤 빛인지를 아느냐
중랑천 뚝방길
중랑천 뚝방을 걷는다
볼이 얼어오는 게 시원하다
장이 녹아내리면 이만큼 시원해질까
녹천에서 장안까지
바람에 녹는 위액들이 검다
시대를 살면서 흘린 피가 저리 검다면
살아가야 할 날들은 얼마나 만흔 피를 어떤 색으로 흘려야 하나
중랑천 뚝방은 혼자 걸어야 한다
냄새를 풍기며 세상을 억류하는 사람만 걸어야 한다
함께 못 가 미칠 듯이 가슴속에 뭉친 사람아
그대 죽음 위로 내리는 서리
하얗게 빛난다
그리움은 방향을 잡으면 사라지는 것일까
김포에서 왔는지 한무리의 갈매기
공중을 휘돌아 새벽처럼 서리처럼
검은 물위로 내렸다
그대 날아 앉은 새벽
뚝방에서 봄과 겨울은 갈리었다
골짜기에 부는 바람 맞으로 산으로 갔다
산만큼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할 얼굴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때, 나는
저녁 골짜기에 부는 바람을 맞으러 산에 간다
골짜기에는 살아온 만큼의 무게를 지닌
낙엽들이 온몸 촉촉이 젖은 채 썩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들은 뒤척이고
낙엽이 뒤척일 때마다 삶이 상해서 풍겨대는 냄새, 냄새는
공복을 그리워하는 소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패부를 찌른다
시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냄새보다
삶이 상해서 풍기는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을 느낄때다
가슴 골짜기에서는
숨어 있던, 햇볕을 덜 맞고 자란, 먼저 상했던 잎들이
냄새를 반기고 있는 것 같다
냄새 때문에 바람이 노니는 게 보인다
무수골의 겨울
날이 남서쪽으로 기우니
좌판처럼 널브러진 마음이 추슬러졌다
해가 우이암에 걸리니
어느 시골 읍내 이발소에 걸려 있던 촌스런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땅에서 어둠이 나오니
검푸른 하늘의 별처럼 근심이 또렷해졌다
객토를 끝낸 논에서 그 사람 냄새가 났다
침엽수의 봄
한파를 피해서 집 떠난 사람
지루한 겨울잠에서 도망나온 도마뱀
바람처럼 빈집을 훑고 떠나면서 남겨둔 잡도둑들의 가슴 두근거림
장작을 패던 모탕 위에서 졸고 있다
나른한 겨울햇살을 등에 지고
저 공중에 정지한 새매
산수유는 언제 물을 빨기 시작할까
살벌한 균형에 사로잡힌 침엽수의 봄
6백년 전 벗어던졌던 갓을
6백년간 새로 짜대는.....
겨울 빛에 마른 고욤은 더이상 떫은 냄새를 풍기지 않을 것이다
무건리*
에는 갓이 있다
*무건리- 삼척군 도계읍 산중에 있는 화전부락. 공양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던 여말 유신들이 화전민으로 정착하면서 갓을 벗어
던졌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현재 아홉 채의 너와집에 그 후예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겨울 한파를 피해서 부락을 떠났다가 이듬해 봄에 부락으로 돌아오는데, 그 기간 동안 농기구나 골동품을 도둑맞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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