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송 시집 창작과 비평사




담 터 (강원도 철원군 금악산 계곡에 위치한 궁예 성터, 현재 성터는 페허가 되어있다)



남기지 못한 유언들

담터 개울가 여기저기 굽은 닥나무로 무성하다

유언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동티 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붉은 빛으로 감시하고 있다


짐승처럼 어둠의 결을 밟으며

궁예를 좆아 담터 가는 길

이름 없는 마을을 지날 때는 두고 온 가족의 이름으로

이름을 지어줬다


회나무골 이모집 뒤뜰 장독대의 늙은 장독처럼 빈 담터

장정들은 궁예의 눈짓에

꼬리 대신 몸을 흔들었고

그 몸짓에 어린것들은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액이 빠져버린 담낭 안으로 궁예가 몰고 들어온 사람들

제 스스로는 알 수가 없었던 거짓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진실

천년간 묵혀 장맛을 들였다


시대의 눈빛을 피해

지금 담터를 찾아든 쓸개빠진 사람아

너를 감시하는 빛이 어떤 빛인지를 아느냐





중랑천 뚝방길



중랑천 뚝방을 걷는다

볼이 얼어오는 게 시원하다

장이 녹아내리면 이만큼 시원해질까


녹천에서 장안까지

바람에 녹는 위액들이 검다

시대를 살면서 흘린 피가 저리 검다면

살아가야 할 날들은 얼마나 만흔 피를 어떤 색으로 흘려야 하나


중랑천 뚝방은 혼자 걸어야 한다

냄새를 풍기며 세상을 억류하는 사람만 걸어야 한다

함께 못 가 미칠 듯이 가슴속에 뭉친 사람아

그대 죽음 위로 내리는 서리

하얗게 빛난다


그리움은 방향을 잡으면 사라지는 것일까

김포에서 왔는지 한무리의 갈매기

공중을 휘돌아 새벽처럼 서리처럼

검은 물위로 내렸다


그대 날아 앉은 새벽

뚝방에서 봄과 겨울은 갈리었다




골짜기에 부는 바람 맞으로 산으로 갔다




산만큼의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할 얼굴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때,  나는

저녁 골짜기에 부는 바람을 맞으러 산에 간다

골짜기에는 살아온 만큼의 무게를 지닌

낙엽들이 온몸 촉촉이 젖은 채 썩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들은 뒤척이고

낙엽이 뒤척일 때마다 삶이 상해서 풍겨대는 냄새,  냄새는

공복을 그리워하는 소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패부를 찌른다

시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냄새보다

삶이 상해서 풍기는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을 느낄때다

가슴 골짜기에서는

숨어 있던,  햇볕을 덜 맞고 자란,  먼저 상했던 잎들이

냄새를 반기고 있는 것 같다


냄새 때문에 바람이 노니는 게 보인다





무수골의 겨울




날이 남서쪽으로 기우니

좌판처럼 널브러진 마음이 추슬러졌다


해가 우이암에 걸리니

어느 시골 읍내 이발소에 걸려 있던 촌스런 풍경화처럼 아름다웠다


땅에서 어둠이 나오니

검푸른 하늘의 별처럼 근심이 또렷해졌다


객토를 끝낸 논에서 그 사람 냄새가 났다






침엽수의 봄




한파를 피해서 집 떠난 사람

지루한 겨울잠에서 도망나온 도마뱀

바람처럼 빈집을 훑고 떠나면서 남겨둔 잡도둑들의 가슴 두근거림

장작을 패던 모탕 위에서 졸고 있다

나른한 겨울햇살을 등에 지고

저 공중에 정지한 새매

산수유는 언제 물을 빨기 시작할까

살벌한 균형에 사로잡힌 침엽수의 봄

6백년 전 벗어던졌던 갓을

6백년간 새로 짜대는.....

겨울 빛에 마른 고욤은 더이상 떫은 냄새를 풍기지 않을 것이다



무건리*

에는 갓이 있다



*무건리- 삼척군 도계읍 산중에 있는 화전부락.  공양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던 여말 유신들이 화전민으로 정착하면서 갓을 벗어

던졌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현재 아홉 채의 너와집에 그 후예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겨울 한파를 피해서 부락을 떠났다가 이듬해 봄에 부락으로 돌아오는데,  그 기간 동안 농기구나 골동품을 도둑맞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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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민음사





그대 잠을 깨라.  어느새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낸 후

술탄의 성탑에 햇빛을 내리쬔다


아침의 허망한 빛이 사라지기 전

주막에서 들려오는 저 목소리,

<사원에 예배 준비가 끝났거늘

어찌하여 기도자는 밖에서 졸고만 있나>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 짧디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성현들과 더불어 지혜를 씨부리고

내 손수 공들여 가꿔봤지만

마침내 거둔 것은 다음 한마디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노라>


어쩌다 태어났나,  어디서 왔나

물처럼 세상에서 속절없이 흐르다가

사막의 바람처럼 세상을 하직하고

어디론지 속절없이 가고만 있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나?

부질없는 것일랑 묻지 말게나

한 잔,  또 한 잔, 금단의 술

덧없는 인생을 잊게 해주리


너와 나의 이야기도 오직 잠시뿐이런가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나 속의 너>

그것을 밝혀볼 등잔을 찾아

두 손 들어 어둠 속을 헤매었으나

밖에서 들리는 그 한마디는 <눈먼 너속의 나>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대고 속삭이는 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전,  한번 가면 못오리>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두려워 마오,  삶을 끝막는 죽음

어찌하여 그대와 내게만 있을쏜가

거품 같은 삶을 빚는 영원한 사키

앞으로도 쉴 새 없이 거품 빚으로


그대와 내가 함께 장막을 지나가도

이 세상은 오래오래 살아 남으리

바닷물에 밀리는 조약돌 인생

머물다 간다 한들 아는 체할 세상인가


잠시동안 머물며 덧없이 맛보노니

사막에서 솟아나는 샘물 같은 삶이로다

보라,  허무에서 태어나 허무로 돌아가는

저 유령 같은 대상,  오 서둘러 살자


반짝했다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인데

벗이여,  삶의 비결 찾느라 인생을 보낼 건가

허위와 진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말해 보오,  무엇에 의지하여 일생을 사나


허위와 진실이 종이 한 장 차이라면

그렇소, 알리프 한 자가 비결이 되오

그 쉬운 비결만 찾아낸다면

갈 수 있으리,  보물 집으로,  하늘나라로


창조물의 핏줄 속에 수은처럼 흐르면서

인간 고통 외면하는 은밀하신 하나님

만물 속에 그 모습 드러내면서

온 세상이 변화해도 그분은 남네


이것인가 하는 순간 어둠 속에 파묻히니

장막 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 연극,

손수 지은 연극을 연출하며 지켜보니

하나님은 영원히 심심풀이하시나


딱딱한 대지를 굽어봅이나

열리지 않는 하늘 문을 헛되이 바라봄도

오늘 그대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이니

내일이면 그대마저 있지 않으리


이런 노력,  저런 논쟁,  시간을 낭비 말라

부질없는 추구야 허망하기 짝이 없다

쓴맛 나는 열매 먹고 슬픔 참느니

잘 익은 포도주로 즐거워하라


벗이여, 푸짐한 술상을 차려 놓고

새 장가 들던 나를 기억하는가

불모의 이성일랑 침실에서 몰아내고

포도 넝쿨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지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흐르는 세월을 헤아릴 수 있음도

내 수학적 계산의 덕분이라 하지만,

별것 아닐세,  태어나지 않은 내일과

사라진 어제를 달력에서 찾았을 뿐


신성할쏜 포도주는 하늘의 열매

누가 감히 그 넝쿨을 함정이라 모독하랴

마시자,  이 축복을 어찌 마다 할쏜가

그게 만약 저주라면 누가 거기 놓았으랴


이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제

죄 많은 몸 지옥 갈까 두렵다 해서

하늘나라 술 기약에 눈이 멀어서

이승의 삶의 묘약 저버릴쏜가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어둠의 문 거쳐간 이 무수히 많았건만

갔던 길 되돌아와 겪었던 일 고하는 이

한 사람도 없다 하니, 어찌 아니 이상한가

그 길을 알려거든 우리 몸소 가야 하리


경건한 자,  유식한 자,  우리 앞에 나타나서

이러쿵 저러쿵 닥쳐올 일 밝히지만,

믿지 못할세라,  그건 모두 잠꼬대

예언을 마친 그들 잠자리도 다시 드네


저승이 어떠한지 지레 짐작해 보려고

볼 수 없는 세계 속에 내 영혼을 보냈더니

이윽고 돌아온 영혼,  이렇게 답을 했네

<내 자신이 천국이요,  지옥일러라>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우리 모두 기껏해야 환등속의 허깨비

삶의 극을 연출하는 하나님께서

한밤중에 빛을 내는 태양등 켜면

줄을 지어 극을 하는 허깨비들


낮과 밤이 엇갈리는 장기판 위에

하나님이 놀며 두는 힘없는 말들,

이리저리 옮기면서 장군 멍군 찾다가

하나씩 죽어서는 골방으로 들어가네


타구장의 공 처지에 가타부타 있을쏜가

치는 이의 뜻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갈 뿐,

우리들을 이 세상에 몰고 오신 분

그분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리


운명을 기록하는 신의 손가락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기록을 찾네

기도나 잔꾀로야 한줄이나 지울쏜가

눈물로 호소한들 한마디나 씻을쏜가


하늘이라 부르는 뒤집힌 그릇,


그 아래 갇혀서 살다 죽는 인생인데

손을 들어 하늘에 구원을 찾지 말라

어차피 하늘인들 아무 힘이 없는 것을


진실로 참회의 맹세 자주 했건만

그 맹세 하면서 내 정신이 맑았던가?

봄 여인이 장미꽃 손에 들고 나타나면

닳아 빠진 참회야 산산조각 깨어졌네


포도주야 못 믿을쏜,  이 몸을 배반했고

명예의 의상을 이 몸에서 벗겼지만

알지 못할세라,  세상에 그 어떤 값진 것이

포도주 상인들의 상품을 당할쏜가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 혹은 seize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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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택시집 문학동네




만화방창


내안

어느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웠습니다






그대

앞에서




방창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홍매



깜박 속았지

한낮에 붉은 입술

캄캄했어

눈 떠보니

가만히 닿던

그 서늘함

흔적이 없었지

꿈이었지

한낮의 꿈

붉은 너의 입술

산을 열고

도를 열고

흙담을 나와

너는 

내 마음속

가장 어둔 곳에

살짝 치껴뜨는 속눈썹 같은

한 송이 꽃이었네




남쪽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환장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앉아 놀다가

한줄기 바람에 날려 흐르는 물에 떨어져 멀리 멀리 흘러 가버리든가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오래오래 

앉아 놀다가 산에 잎 다 지고 나면 늦가을 햇살 받아 바삭 바삭 바스라지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리둘이 똑같이 물들어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버리든가



마른 장작



비 올랑가

비 오고 나면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면 꼭 좋겄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겄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봄비




비가 오네요

봄비지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앞강에 물고기들 오르는 소리에

문득 새벽잠이 깨었습니다







새 울고 

비 오네

빗소리 속에

새 울고

그대 그립네

가을이 이렇게 와서

새소리처럼 머물다가

가네 

새소리 

따라가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삷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들어

꽃,

다졌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들이 흔들거리며 햇살을 쏟아냅니다 눈이 부시네요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지요

차들이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늘 보던 풍경이 때

로 낯설 때가 있지요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지요 어디만

큼 오고 있을 그대를 생각합니다 그대가 오는 그 길에 찔레꽃

은 하얗게 피어 있는지요 스치는 풍경 속에 내 얼굴도  지나가

는지요 참 한가합니다 한가해서,  한가한 시간이 이렇게 아름

답네요 그대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대를 생각하다가 나는,  무슨 생각이 났었는지,  혼자

웃기도 하고,  혼자 웃는 것이 우스워서 또 웃다가, 어디에선지

 불쑥 또다른 생각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생각을 이을 필요

도 없이 나는 좋습니다 이을 생각을 버리는 일이 희망을 버리

는 일만큼이나 평화로울 때가 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

뭇잎이 흔들립니다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디서 그대를 기다릴

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지나 갑니다 아! 산다

는 것,  사는 일이 참 꿈만 같지요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내가 내 편이 아닐 때에도 당신은 내 편이었지요

어디만큼 오셨는지요 차창 너머로 부는 바람결이 그대 볼

을 스치는지요 산과 들, 그대가 보고 올 산과 들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갑니다 기다릴

사랑이 있는 이들이나, 기다리는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

들은 행복합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습니다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도

세상도 저기 가는 저 수많은 차와 사람들도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사랑은 어디서든 옵니다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색다른 사랑이 올 줄을 몰랐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



작은 찻잔을 떠돌던 노오라 산국차 향이 아직도 목젖을 간질입니다

마당 끝을 적시던 호수의 잔물결이 붉게 물들어 그대 마음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렸지요

지금도 식지 않은 달콤한 꽃향이 가슴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모르겠어요

온몸에서 번지는 이 향이

산국 내음인지 당신 내음인지

나 다 젖습니다



첫사랑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쌍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봄날은 간다




진달래


염변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

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 불겄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성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치라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

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

은 다 같니라




무심한 세월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잉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낙화유수



머리가 허연 할머니 한 분이 마을에서 걸어나와 옷을 입은

채 강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허연 머리끝까지 강물에 다

잠기고,  연분홍 산복숭아꽃 이파리 한 장이 물 위로 떠 오른

다 꽃잎이 일으킨 물결이 강기슭에 닿을 때,  강굽이를 돌아가

던 꽃 이파리가 마을을 잠깐 뒤돌아본다


햇살이 고운 봄날이다




이십일 년 전



나하고 사니라고 애썼네이인

사는 것이 참 금방이구만

사는 것이 바람 같은 것이여

머리맡에 앉은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아버지는 자기의 일생을 그렇게 정리하셨다


이십일 년 전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눈길 가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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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태주 시집 시학





가을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잦다


어제 밤에 유리창에 들이비친

달빛을 탓했고


그제 밤엔 골짜기 가득 메운

소낙비를 핑계 삼았다


자다가 깨어 문득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때도 있다.



아내



새 각시 

새 각시 때

당신에게서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번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도 모르게

눈을 감곤 했지요


그건 아직도 그렇습니다.





스님이 목탁을 치던 자리


목탁만 남았다가


목탁 소리만

또 남았다가


솔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능소화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떨어지고 마는 어여쁜

눈부신 하늘의

육체를 본다


그것도 비 내리시는 이른 아침


매디매디 또다시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얼핏.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산수유꽃만 그런 게 아니다



이름을 알게 되면

잘 보인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더욱 잘 보인다


그리워하게 되면

못 잊는 그 무엇이 된다


마침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가슴속으로 들어와 꽃으로 바뀐다.



인생



해 저물녘 빈 하늘을

둘이서 바라보는 것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구름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


낯선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이름도 모를 새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는 것


작은 키 긴 그림자 둘이서 데리고

빈방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



하늘 눈빛



두 손을 놓고 나면

흰구름도 볼 만하고

은사시나무,  바람에

몸을 비트는 은사시나무도

봐 줄 만하다


어,  아직도 그 주소에서

살고 있군요

나도 그렁저렁 밥술이나

벌어먹고 지냅니다


햇파 냄새 햇마늘 냄새도

조금 번지면서 연보라 빛

눈물도 찔끔 흘리면서

어디선 듯 내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상쾌



시골 살면서도 꽃 한 포기 가꿀 줄 모르고

풀 한 포기 뽑을 줄 모르는 시골 아이들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학교 처마 밑 좁은 땅에

봉숭아꽃을 심고 학교 실습지 한 귀퉁이에

고구마 순을 묻었다


봉숭아꽃을 심으며 꽃이 피면

손톱에 꽃 물 들여주고

고구마 순을 묻으며 가을 오면

함께 고구마를 캐보자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길길이 뛰면서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떤 아이는

가슴이 상쾌하다고 말했다

상쾌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었을까


아이들 가슴속에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얘들아 반갑다



아침마다 문을 조금씩 열어놓는다

혹시나 유리창에 가려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수줍은 햇빛들도 들어오게 하고

바람이며 새소리도 조금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다


바람을 따라 먼지 같은 것도

덤으로 들어온단들 어떠랴!

들어와 나랑 함께 잠시 놀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될 일 아니겠나?


현관 쪽으로 난 문도 뻥긋이 조금 열어놓는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이들 후당탕거리며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도 조금 들어와

내 마음속에 잠시 머물어 놀다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얘들아, 반갑다

다 반갑다.




서른다섯 살



앓는 사람은 앓는 사람이고

혼자 남아 길고 긴 젊음의 강물을

서럽게 서럽게 건너갈 아내는 어쩔 것이며

두 아이의 초롱같은 눈매는 또 어쩔 것이냐

나이 서른다섯 살

앞날이 창창할 때 구만리 같을 때

세상살이 아직은 잘 알지 못할 때.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나 이미 오래 전에 남의 아버지 되어버린 사람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세상한테 바람맞고 혼자가 되어 쓸쓸할 때

그늘 넓은 나무는 젊은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손길을

뻗쳐 나를 감싸주시고

푸르는 산은 이마 조아려 나를 내려다보며

젊은 아버지처럼 빙그레 웃음 지어 보이신다

짜아식 별걸 다 갖고 그러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으면 된다니까

나 머잖아 할아버지 될 입장이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철부지 손자거나 아예 어린 아이 되고

싶은 때 있다

흘러가는 흰 구름은 잠시 머리 위에 멈춰 서서

보일 듯 말 듯 외할머니 둥그스름한 얼굴 모습도 

만들어주고

할머니 작달막한 뒷모습도 보여주지 않는가

오빠야 오빠야 때로는 이름 모를 조그만 풀꽃들 

발 뒤꿈치를 따라오며

단발머리 어린 누이들처럼 쫑알쫑알 소리 없는 소리들을

가을 들길에 풀어놓지 않는가

나 세상한테 괄시받고 쪼금은 보랏빛으로 물들었을 때

제 풀에 삐쳐서 쪼끔은 쓸쓸할 때.




시인 * 1



아서라, 그대

세상을 위해 살았노라

대신해서 울었노라

큰소리치지 마라


오늘도 그대

스스로를 위해 밥숟갈을 들고

자신의 슬픔과 기쁨 위해

한숨 흘리지 않았던가


부디 그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노여워하지 말고

그대 자신이 세상을 더 잘 알지 못함을 

한탄하라


다만 그대의 흐린 별빛

어두운 밤길 헤매는 


한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고 그의

고달픔을 달래 수 있음만 감사하라.



흐르는 봄날



황사바람 속 흐린 하늘 아래

서둘러 꽃들은 또 한 번 까무러칠 듯 피었다 지고 

신록은 덧칠로 어우러지기 시작하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길거리 헤매다가 혼자서 중국집에 들러

짬뽕 한 그릇 시켜서 먹고 있다

느닷없이 핑그르르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건

국물이 너무 매워서 그런 걸까 뜨거워 그런 걸까

이 짬뽕을 다 먹고 나도 하늘은 여전히 찌뿌둥할 것이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와주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허무한 거야 자네도 부디 잘 살다 오시게

창 밖에서 누군가 날더러 말을 걸고 싶어한다


거지 같은,  참 걸뱅이 같은 봄날이 

빨리도 흘러간다.



모퉁이 길



혼자 오래 서 있었다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서 있는다 싶었던지

바람이 지나가다 물었다

외로우냐고....


한참을 더 있다가

풀꽃 향기가 다가와 물었다

슬픈일이 있냐고....


한참을 또 그러고 있는데 

흰 구름이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며 그윽한 말투로 물었다

가야 할 곳이 마땅치 않냐고...


바람이 지나가고

풀꽃 향기가 스쳐가고

흰 구름이 흘러가고...

그러나 끝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늦은 봄날의 일이었다.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깨달음에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감동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준 옛날 얘기 가운데 한가지다.

참으로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다 싶은데 외할머니는

 아주 열심히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그것도 여러 차례

들려주셨다. 암캥이가 빠지면 수캥이가 건져주고 수캥이가 빠지면

암캥이가 건져주고...

우리네 인생살이란 것도 시시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구슬프고 눈물나는 것이 인생살이란 것이겠구나. 

요즘은 나도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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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저 골목 오르막길

오순도순

거기

가난한 집의 행복이 정녕 행복이니라


*

가던 길 고라니가 

물 속의 달 가만히 바라보네


*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 구멍이 안 보여


*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의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

모래개펄 지나

아무 말 않고

바다 속

아무 말 않고

아기거북이는 먼 길 가더라


*

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

나는 내일의 나를 모르고 살고 있다


술 어지간히 취한 밤

번개 쳐

그런 내가 세상에 드러나버렸다


*

어머니 없는 인간의 때 오리라


동물원

오랑우탄 어미와 새끼

한참 바라보았다



*

내 집 밖에 온통

내 스승이다


말똥 선생님

소똥 선생님


어린아이 주근깨 선생님


*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말인가

푸른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



*

다시 한번 폭발하고 싶어라

불바다이고 싶어라


한라산 백록담



*

강원도 진부령인가

이 세상의 눈 경치만한 것

또 있겠는가


봄날도 

가을 단풍도

동해 쪽빛도

섭섭함 아니던가



*

천년 내내 손님 노릇하네

하필

수련꽃 위에 앉은 잠자리도 나도


*

온종일 장마비 맞는 거미줄

너에게도 큰 시련이 있구나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팽이가 돈다

어제 미당이 갔다

오늘 우리 동네 오영감이 갔다

어찌 죽음이 하나둘만이리오

어린아이 팽이에 뭇 죽음들이 삥 둘러서 있다



*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녀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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