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시집 민음의시 민음사





새벽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부치지 않은 편지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폭풍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날으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봄눈




나는 그대 등 뒤로 내리는

봄눈을 바라보지 못했네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대 텅빈 가슴의 말을 듣지 못했네

새벽은 멀고

아직도 바람에 별들은 쓸리고

내 가슴 사이로 삭풍은 끝이 없는데

나는 그대 운명으로 난 길 앞에 흩날리는

거친 눈발을 바라보지 못했네

용서 받기에는 이제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

다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사막처럼 엎드린 그대의 인생 앞에

붉은 무덤 하나

흐린 하늘을 적시며 가네

검정고무신 신고

봄눈 내리는 눈길 위로

그대 빈 가슴 밟으며 가네




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새벽에 아가에게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은 있는가 보다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은 있는가 보다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퀴 같은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아직 없나니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지라도

아가야 하늘에는 거지별 하나




가을편지



너는 침묵할 때 간절히 기도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진실로 사랑했는가


마음 착한 이들의 분노를 위해

그립고 푸른 하늘의 위해


너는 침묵할 때 죽음을 생각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어머니가 그리웠는가


가을바람 불어와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흐르던 강물조차 흐르지 않는

이 가을 눈부신 햇빛 속에서


너는 홀로 침묵의 들꽃으로 피었는가

너는 홀로 침묵의 저어새로 울었는가




산성비를 맞으며




산성비를 맞으며

모란이 핀다


오늘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해가 저문다


슬픈 까마귀는 날아서

어디로 가나


살아가는 분노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드디어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위하여


산성비를 맞으며 피어나는

모란을 바라보며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혼자 밥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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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민음사





참으로 아름다운 5월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꽃봉오리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네.


참으로 아름다운 5월,

모든 새들이 노래부를 때,

나의 그리움과 아쉬움

그녀에게 고백했네.




연꽃<밤과 달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낭만적 서정시로서 슈만의 작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연꽃은 찬란한

햇님이 두려워,

머리 숙이고 꿈꾸며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달님은 그녀의 연인,

달빛이 비쳐 그녀를 깨우면,

연꽃은 수줍게 얼굴을 들고

상냥하게 님을 위해 베일을 벗는다.


연꽃은 피어 작열하듯 빛나며

말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향내음 풍기며 사랑의 눈물 흘리고

사랑의 슬픔 때문에 하르르 떤다.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  애타게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때 세상은 그래도 다사로웠고,

사람들은 한가롭게 살아갔었지.


허나 이제 모든 것은 뒤바뀌어,

이곳에는 혼잡!  저곳에는 궁핍!

천상에서는 하느님이 돌아가셨고,

지상에서는 악마가 거꾸러졌다.


하여 모든 것은 참을 수 없이 음울하고,

헝클어지고 썩어 문드러지고 차갑게만 보인다.

이제 한 조각 사랑마저 없다면,

어디에 발 붙일 곳이 있으랴.





비극 1





나와 함께 도망가서 나의 아내가 되어,

내 가슴에 기대어 편히 쉬어라.

머나먼 타국에서는 나의 가슴이

너의 조국이고 아버지의 집이다.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죽고,

너는 혼자서 외롭게 되어,

네가 비록 아버지의 집에 있다 해도,

타국에 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언




저녁 어둠 다가오고

물결은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데

나는 해변에 앉아

파도의 하얀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고

너를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스런 너의 모습,

그 모습 어디를 가나 나의 주변을 떠돌고,

어디를 가나 나를 부른다.

어디서든지,  어디서든지

바람소리 속에서도,  바닷소리 속에서도,

그리고 내 가슴의 탄식 속에서도,


가느다란 갈대를 꺾어 나는 모래에 썼다.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심술궂은 파도들

이 달콤한 고백 위로 몰려와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꿈과 삶




낮은 휘황하게 빛났고,  나의 가슴은 타올랐다.

말없이 마음속에 나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밤이 왔을 때,  나는 남몰래

조용한 곳에 피어 있는 장미에게로 갔다.


무덤처럼 소리없이 침묵하며 나는 다가갔다.

눈물만 빰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장미의 꽃받침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눈부신 빛과 같은 것이 밖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즐겁게 장미나무에서 잠들었다.

그러자 익살맞은 꿈이 장난을 쳤다.

나는 장밋빛 소녀의 영상을 보았고,

장밋빛 코르셋으로 덮여진 가슴을 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예쁜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황금빛으

로 부드러운 무엇인가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곧 조그만 황금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 집에는 모든 것이 놀랍게 다채로웠고,

멋있는 원을 그리며 많지 않은 사람들이 빙빙 돌아

갔다.


거기에는 열두 사람이 끝없이 춤을 추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춤이 한 곡 끝나려 하면,

다른 춤이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무도곡이 나의 귀에는 이렇게 울려왔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느니,

너의 모든 삶은 하나의 꿈에 불과할 뿐,

그리고 이 시간은 꿈속의 꿈이려니.>-


그 꿈은 지나갔고,  아침이 밝아온다.

나의 눈은 재빨리 장미를 바라본다,_

오 슬프다! 빛나는 작은 섬광 대신

장미의 꽃받침 속에는 차가운 벌레가 한 마리 숨어

있다.





무슈<하이네가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돌보아준,  하이네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절망적이었던 마지막 사랑> 를 위하여




너는 꽃이었다,  사랑하는 소녀야,

키스만 하여도 나는 너를 알 수 있었지.

어느 꽃의 입술이 그렇게 보드랍고,

어느 꽃의 눈물이 그렇게 뜨거우랴!


나의 눈이 감겨 있어도,  나의 영혼은

언제나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마주보았지,  행복하고 황홀하게,

그리고  달빛을 받아 요정처럼 빛나며!


우리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네가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들었지_

우리가 한 말은 아무 부끄러움도 아니고,

침묵은 사랑의 순결한 꽃이려니.


소리없는 대화! 남들은 거의 믿지 않겠지,

말없이 사랑만이 오가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즐거움과 전율로 엮어진,  여름밤의 

아름다운 꿈속에 어찌하여 시간이 그리도 빨리 흘러

가버리는지를.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결코 묻지 마라! 처

라리

개똥벌레에게 물어보라,  왜 풀숲에서 반짝거리는지를,

물결에게 물어보라,  왜 개울에서 졸졸 흐르는지를,

서녘바람에게 물어보라,  왜 윙윙 불어오는지를.


물어보라,  루비에게,  왜 빛나느냐고,

물어보라,  꽃무와  장미에게,  왜  향기를 풍기느냐

고-

하지만 결코 묻지 말라,  무엇 때문에 고뇌의 꽃과

사자가

달빛 아래 애무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 서늘한 대리석 궤짝 속에서 졸며

아름다운 기쁨의 꿈을 누렸는지를.  아,  이제

내 조용한 안식의 기쁨은 스러져버렸다!


오 죽음이여!  무덤에 깃드는 그대의 정적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환희를 줄 수 있다.

어리석고 거친 삶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정열의 경

련과 안식 없는 쾌락을 주었거니.


                  .......................................



드디어 죽음이 온다-   이제 나는 말하리라,

영원히 침묵하기 전에

자랑스럽게.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나의 심장은 너를 위하여 뛰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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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다시 읽는 천 년의 시  민음사







그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돕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 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슬픔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백두산 천지에서-

-정채봉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 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 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 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꿈꾸는 세상

-장사익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베풀며 나누는 따스한 세상

맑은 물 흐르고 푸른 산 드높은

그런 세상 꿈을 꾸며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구름이 오면 구름을 타고

바람 불면은 바람을 따라

멀리멀리 높이 높이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그 꽃

-고은




내려갈 대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동천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기어 가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으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

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

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

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

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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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언 시집 민음사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

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

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

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

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

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

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

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개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커피를 쏟다





산의 한쪽 어깨가 날아가 버린 날.  난 그저 통조림 뚜껑

을 였었고,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 그

들과 나의 폐활량 차이를 궁금해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몇

개의 산맥을 넘어가 버린 날도 난 그저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을 뿐입니다.  다 세월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마음에

남을 뿐 지나가 버린 일입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

히는 일이나 후진하다 담벼락을 들이받는 일조차 원래 일

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


나는 언제나 내 강물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강물을 보고


그나마 세월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것만 겨우 알았을 

뿐입니다.

원래 일어날 일들이었습니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슬픈 빙하시대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

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

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

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

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

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달리기





두 발로 선 대신 뇌가 무거워졌습니다.  수백만 년 전의

대가.


처음엔 삶의 한 풍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고,  그다음엔

저기에 사랑이 있다고 해서 달렸습니다.  신념이나 욕망 같

은 것들을 어깨에 얹고 달렸습니다.


곡선주로를 빠져나온 그 어느 날 이것저것 다 빼면 달리

기만 남았습니다.  성채를 지을 것 같았던 신념도 내 것이

아니었고,  기름기 잔뜩 밴 욕망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

보니 사랑도 없었습니다.


달리기만 남았습니다.

한 사람이 불현듯 자유롭습니다.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

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

라며 시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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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집 민음사




바늘의 무렵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 다니는 바

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

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

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을 찾

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

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





마침내 아주 작은 책이 되어 버린 어떤  '무렵'




이 책의 효과는


눈을 감고 있으면

누구나 잠시 후 자신이 바람이 된다는 걸 알기까지


눈을 감은 채

나는....... 바람이....... 된다......

라고

자신의 눈에게 속삭일 때까지


눈을 감고

당신은 스스로를 바람이라고 한 번만 생각해 보아라


그대여 잘 흘러가고 있는가


그곳이 어디든 

바람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이제 눈을 뜨면

누구나 자신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바람의 시차라고 생

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눈이 되어 바람이 돌아올 즈음


무용수의 발처럼


눈을 감은 채

누구나 자신의 무덤 속에 한 번은 누워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음역이다




종이로 만든 시차3

-종이연



좋은 연을 만들기 쉬해서는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좋

은 바람을 상상할 줄 아는 것이 먼저다.


연은 일단 손을 떠나기 시작하면 바람과 가장 닮은 시

간을 찾고 바람이 멀리서 듣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옮기고

있는 느낌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연을 실로부터 풀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이 바람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기다리면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바람이 연을

데려간다.  연날리기란 바람과 연 사이에 '긴 현' 을 놓아

주는 것에 불과하다


공책 한 권을 앞에 놓고 이것을 종이비행기로 바꿀 것인

가,  종이배로 바꿀 것인가의 갈등이 우리가 지금까지 날리

고 있는 연의 항해이다.  그 시차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어

딘가로 이어져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는 일이 허공에 쌓

이고 있는 하나의 사회로 우리가 드나드는 일이듯이,  시란

질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선을 믿어야 한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서로의 연처럼, 

그 시차에 서명한다.




"진정한 여행자들은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이다." 


   - 보들레르.<여행> -


"여행의 언어는 시차이다. ...... 여행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시차를 겪다가 오는 일종의 경험인데, 그 경험의 끝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시차를 겪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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