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 문학동네
그 시절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들듯 시들어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그 시절 시들듯 그도 시들어갔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사람
어디 없는가
모가지째 떨어지는 붉은 동백같이
일생에 단 한 번 하얗게 꽃 피우고 죽어버리는 대나무같이
늘 푸른 마음을 가진....
오래된 숲2
바람이 숲을 지날 때 나무도 풀도 떨어진 잎새까지도 봄을
구부려 우우 소리내어 웁니다 숲은 오랜 무료함에서 깨어나
잊었던 몸짓을 다시 생각해내는 듯 몸을 떱니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만....
숲은 고요에서 깨어나는 일이 귀찮아도 그로써 숲임을 확
인합니다 태양은 따스함으로 비는 빗물로 바람은 떨림으로
그리고 어둠은 고요한 쉼으로 생명을 주고 키우며 그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부단히 누군가를 상관하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상관하려 들 것입니까 사랑이
없다면 땅도 비도 눈도 바람도 햇빛도 그리고 마음도 없는 황
량한 죽음뿐일 것입니다
외로운 식량
이슬만 먹고 산다 하데요
꿈만 먹고 산다 하데요
그러나 그는 밥을 먹고 살지요
때로는 술로 살아가지요
외로움을 먹고 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
사실은 외로움만 먹고 살아가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이지요
예쁜 꽃
이제 더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봄편지
안녕하십니까.
미황사입니다.
잘 계시지요?
동백이 많이 피었습니다
매화도 피었고요.
문득 한번 내려오시지요.
.....
봄의 幻
부스스한 얼굴이다.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났다. 헝클어
진 머리칼 새로 빈 까치집도 보인다. 설 쇠러 간 까치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들에 울긋불긋 아롱거리는 것은 꽃이 아니
다 아니다. 꽃이다. 봄꽃! 이른 봄 들에 피는 사람꽃.
아직 매화는 피지 않았다. 첫 달거리 맞은 가시내 젖꼭지
마냥 몽글몽글하다. 막 벙그러질 참이다. 지난 겨울 화단 모
퉁이에서 내내 꽃대만 세우고 있던 상사화도 다시 생각을 들
어올리는 중이다 언덕바지에 가시내 몇 위태롭게 봄풀을 뜯
고 있다. 갓 물을 올린 보리밭 이랑, 들판으로 번져나갈 기세
다. 아직은 졸리운 이른 봄 들판.
산령을 넘으며
거기에 그런 고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람 세차고
높은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이미 지나가 잘 닦여진 깊은 산속
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거기에 있었다 한 고개만 넘으면 드넓
은 바다로 나가는 깊은 산과 바다가 그렇듯 가까이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니....
가파르게 살아온 삶에 무심했듯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는 고개 또한 무심하다 나는 지금껏 그러한 곳이 있다는 것
도 모르고 살아왔다 고갯마루에 올라 가쁜 숨을 멈춘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저편의 풍경을....
가을밤
마음도 이쯤 되면 서언할 것이다 깊을 것이다
향기도 없는 풀꽃 한 송이 한가로이 피워낼 것이다
밤하늘에 피어나는 별꽃들 더욱 초롱할 것이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시월 보름달, 저 홀로 불그스레 이울어갈 것이다
풀벌레 소리도 그친 적막의 시간.
건듯 부는 바람에 몸을 떠는 풀잎의 이슬
절름발이
그대를 기다렸네.
이미 늦은 줄 알지만.
날 부축해 갈 수 없냐고
전화를 했네.
그대는 끝내 오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절룩거리며
아픈 다리 끌고 가네.
정처 없는 길을 가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지만
더이상 날 부축할 이,
이제 세상에 없을 것이니
봄꽃,
저 홀로 피었다 지듯
오직 나 혼자뿐!
옻나무
남도 어디쯤 길을 가네
벼 이삭 노랗게 익어가는데
산빛 여전히 푸르른데
꽃단장하고 수줍게 숨어 있네
-조심해라, 옻 오를라
가까이해선 안 될 것들은
가시를 키우든 독을 품든 하네
다가설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화려한 분장에 쉬이 빠지느니....
나는 가슴에 깊은 흔적을 하나 가지고 있네
뻗신 장미꽃 가시에 찔린, 혹은
멋모르고 다가가 어루만지다가 오른 옻자국
꽃도장
그 가시내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학길 울긋불긋 코스모스
길 따라 코스모스처럼 웃으며 재잘대며 집으로 가던 가시내
빠알간 코스모스 꽃모가지 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살금살
금 다가가 새하얀 교복 등짝에 차알싹 꽃도장 찍으면 깜짝 놀
라 화난 얼굴로 뒤돌아보며 초롱한 눈 이쁘게 흘기던 가시내
등에 찍힌 꽃도장 보며 달아나며...... 너는 이제 내 각시다
속으로 좋아라 어쩔 줄 몰라 흰 교복에 번질세라 등에 찍힌
꽃도장 털지도 못하고 꽃 같은 입으로 궁시렁 궁시렁 욕바가
지 쏟아내다가 피식 웃어버리던 가시내 꽃 모양도 선명한 코
스모스 꽃도장 등에 박고도 코스모스같이 웃던 가시내 지금
은 어디에 있을까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그 가시내 오늘 문
득 코스모스길을 가다 생각이 나네
DNA
못 끊어
끊을 수 없어
끊는 즉시 사망이야
살아도 죽음이야
장마철 방구들 뒹굴다
손을 뻗으면, 거기 그대 있어
불현듯 그 짓이나 하고 싶어라
심심풍리 심심초
생각 사라 사념초
깊이 들이마신 연기처럼
생각도 깊어 푸르러라
칼칼한 소리
잔소리인 양 흘려버리다가도
싱긋 웃으며 다가서고 싶은 그대
전폐에 숨 헐떡이듯
가슴 깊이 그대 물기에 젖어
그 속, 나, 헤어나지 못하네
치자꽃 피는 밤
늦여름 매미 한 마리 시원하게 울고 간 다음 사과밭에는
사과가 뚝뚝 떨어져 쌓였다 윗마을 조씨는 매미가 울기 시작
하자 그놈 잡는다고 온종일 소리를 쫓아다니다 저녁 무렵에
야 잔뜩 불쾌해진 얼굴로 돌아와 무논밭 나락처럼 쓰러졌다
물의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치자나무 휘몰아치는 바람에
도 아랑곳없이 하얀 꽃잎 마구 피워올리더니.... 소주병 뒹
구는 건넌방 처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방 총각 훔쳐보고 있
다 냄새인 듯 향기인 듯 코끝 맴도는 페로몬향 가득 떠다니
는 밤
散骨을 하며
-어머님께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맑습니다
산색 더욱 푸르러 여름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집을 한 채 지어주셨으나 저는 당신에게 산집
한 채 지어드리지도 못합니다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물러 고단하고 싫증이 났을 터이므로
저는 당신을 훠이 훠이 풀어드립니다
더러는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십시오
더러는 주린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가 먼 땅에 다시 태어
나십시오
더러는 빗물에 씻겨가 물색 산천어와 노니십시오
더러는 나무와 풀도 기르십시오
그리고 더러는 꽃으로 피어 가을날 저희들 찾아오는 길 따
라 손을 흔들어주십시오
당신은 꽃을 많이 기르고 싶다 하셨지요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
당혹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
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적막한 귀가
[매너모드] 3월 10일 월요일 오후 열시 삼십팔분 오늘 하
루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에
행여 들리지 않을까 진동으로 해놓고 온종일 들고 다니면서
혹 손떨림을 느끼지 못했을지 몰라 가끔씩 들여다보았지만
[부재중 전화] 표시는 없었다 누구도 전화하지 않은 거다 아
무도 날 찾지 않은 것이다 어디에요 언제 들어올 거에요 하다
못해 그런 전화마저도 없었다
젊은 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돌아다닐 때 버스에서 만난
한 여자가 물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
데요 혼자 다니면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할까..... 혼자는 외
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
른다....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싶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오늘도 참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