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교훈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 세상이기에

참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하였다

이유 없는 투정을 누구에게 부려 보겠느냐

성미가 좀 나빠도 내버려 두기로 한다



無題



설움이 구름같이

피어날 때면

높은 하늘 파란 빛

쳐다봅니다


물결같이 심사가

일어날 때면

넓은 바다 푸른 물

바라봅니다



연정



따스한 차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친구를 잃고



生과  死는

구슬같이 굴러간다고


꽃잎이 흙이 되고

흙에서 꽃이 핀다고


영혼은 나래를 펴고

하늘로 올라간다고도


그 눈빛 그 웃음소리는

어디서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전해 들은 이야기



잔주름져가는 눈매를

그녀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이제는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그런 사위움도 아니오

중년부인이란 말이 서운하여서도 아니다

그녀를 그렇게 슬프게 하는 것은

세월도 어찌하지 못하는,  언제나 젊은 한 여인이 남편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이 봄



봄이 오면 칠순

고목에 새순이 나오는 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연못에 배 띄우는 아이같이

첫나들이 나온 새댁같이

이 봄 그렇게 살으리라




만남




그림 엽서 모으며

살아왔느니


쇼팽 들으며

살아왔느니


겨울 기다리며

책 읽으며-

고독을 길들이며

살아온 나


너를 만났다

아 너를 만났다.




고백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 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기억만이




햇빛에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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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종환 문학동네



오늘밤 비 내리고




오늘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알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사월 목련




남들도 나처럼

외로웁지요


남들도 나처럼

흔들리고 있지요


말할 수 없는 것뿐이지요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것뿐이지요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월 목련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사랑을 하면서도 잎 지는 소리에 마음 더 쏠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흩어지는 산향기에 마음 더 끌려라

님은 더 깊이 사랑하는데 나는 소쩍새 소리에 마음 끌려라

사랑을 하다가도 사라지는 별똥 한 줄기에 마음 더 쏠려라




세우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 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지 젖는 강기슭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울바위



작약꽃 옆에서 발을 씻는다

송홧가루 날려와 물가에 쌓인다

세상 근심에 여럿이 밤을 지샌 아침에도

울바위 아래 어여쁜 물 무심히 흘러라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그리움도 설렘도 없이 날이 저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굴엔 검버섯 피는데

눈물도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빗방울 하나에 산수유 피고 개나리도 피는데

물결도 파도도 없이 내가 저문다




고요한 물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봄산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철쭉꽃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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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 문학동네



그 시절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들듯 시들어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그 시절 시들듯 그도 시들어갔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사람



어디 없는가

모가지째 떨어지는 붉은 동백같이

일생에 단 한 번 하얗게 꽃 피우고 죽어버리는 대나무같이

늘 푸른 마음을 가진....




오래된 숲2



 바람이 숲을 지날 때 나무도 풀도 떨어진 잎새까지도 봄을

구부려 우우 소리내어 웁니다 숲은 오랜 무료함에서 깨어나

잊었던 몸짓을 다시 생각해내는 듯 몸을 떱니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만....


 숲은 고요에서 깨어나는 일이 귀찮아도 그로써 숲임을 확

인합니다 태양은 따스함으로 비는 빗물로 바람은 떨림으로

그리고 어둠은 고요한 쉼으로 생명을 주고 키우며 그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부단히 누군가를 상관하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상관하려 들 것입니까 사랑이

없다면 땅도 비도 눈도 바람도 햇빛도 그리고 마음도 없는 황

량한 죽음뿐일 것입니다




외로운 식량



이슬만 먹고 산다 하데요

꿈만 먹고 산다 하데요


그러나 그는 밥을 먹고 살지요

때로는 술로 살아가지요

외로움을 먹고 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

사실은 외로움만 먹고 살아가지요


외로움은 그의 식량이지요



예쁜 꽃



이제 더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봄편지



안녕하십니까.

미황사입니다.

잘 계시지요?


동백이 많이 피었습니다

매화도 피었고요.

문득 한번 내려오시지요.

.....



봄의



 부스스한 얼굴이다.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났다.  헝클어

진 머리칼 새로 빈 까치집도 보인다.  설 쇠러 간 까치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들에 울긋불긋 아롱거리는 것은 꽃이 아니

다 아니다. 꽃이다.  봄꽃! 이른 봄 들에 피는 사람꽃.

 아직 매화는 피지 않았다.   첫 달거리 맞은 가시내 젖꼭지

마냥 몽글몽글하다.  막 벙그러질 참이다. 지난 겨울 화단 모

퉁이에서 내내 꽃대만 세우고 있던 상사화도 다시 생각을 들

어올리는 중이다 언덕바지에 가시내 몇 위태롭게 봄풀을 뜯

고 있다.  갓 물을 올린 보리밭 이랑,  들판으로 번져나갈 기세

다. 아직은 졸리운 이른 봄 들판.




산령을 넘으며




거기에 그런 고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람 세차고

높은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 이미 지나가 잘 닦여진 깊은 산속

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거기에 있었다 한 고개만 넘으면 드넓

은 바다로 나가는 깊은 산과 바다가 그렇듯 가까이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니....

 가파르게 살아온 삶에 무심했듯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는 고개 또한 무심하다 나는 지금껏 그러한 곳이 있다는 것

도 모르고 살아왔다 고갯마루에 올라 가쁜 숨을 멈춘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저편의 풍경을....



가을밤



마음도 이쯤 되면 서언할 것이다 깊을 것이다

향기도 없는 풀꽃 한 송이 한가로이 피워낼 것이다

밤하늘에 피어나는  별꽃들 더욱 초롱할 것이다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시월 보름달,  저 홀로 불그스레 이울어갈 것이다

풀벌레 소리도 그친 적막의 시간.

건듯 부는 바람에 몸을 떠는 풀잎의 이슬



절름발이




그대를 기다렸네.

이미 늦은 줄 알지만.

날 부축해 갈 수 없냐고

전화를 했네.


그대는 끝내 오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절룩거리며

아픈 다리 끌고 가네.


정처 없는 길을 가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지만

더이상 날 부축할 이,

이제 세상에 없을 것이니


봄꽃, 

저 홀로 피었다 지듯 

오직 나 혼자뿐!



옻나무



남도 어디쯤 길을 가네

벼 이삭 노랗게 익어가는데

산빛 여전히 푸르른데

꽃단장하고 수줍게 숨어 있네


-조심해라,  옻 오를라


가까이해선 안 될 것들은

가시를 키우든 독을 품든 하네

다가설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화려한 분장에 쉬이 빠지느니....


나는 가슴에 깊은 흔적을 하나 가지고 있네

뻗신 장미꽃 가시에 찔린,  혹은

멋모르고 다가가 어루만지다가 오른 옻자국



꽃도장



그 가시내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학길 울긋불긋 코스모스

길 따라 코스모스처럼 웃으며 재잘대며 집으로 가던 가시내

빠알간 코스모스 꽃모가지 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곤 살금살

금 다가가 새하얀 교복 등짝에 차알싹 꽃도장 찍으면 깜짝 놀

라 화난 얼굴로 뒤돌아보며 초롱한 눈 이쁘게 흘기던 가시내

등에 찍힌 꽃도장 보며 달아나며...... 너는 이제 내 각시다

속으로 좋아라 어쩔 줄 몰라 흰 교복에 번질세라 등에 찍힌

꽃도장 털지도 못하고 꽃 같은 입으로 궁시렁 궁시렁 욕바가

지 쏟아내다가 피식 웃어버리던 가시내 꽃 모양도 선명한 코

스모스 꽃도장 등에 박고도 코스모스같이 웃던 가시내 지금

은 어디에 있을까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그 가시내 오늘 문

득 코스모스길을 가다 생각이 나네



DNA



못 끊어

끊을 수 없어

끊는 즉시 사망이야

살아도 죽음이야


장마철 방구들 뒹굴다

손을 뻗으면, 거기 그대 있어

불현듯 그 짓이나 하고 싶어라

심심풍리 심심초

생각 사라 사념초

깊이 들이마신 연기처럼

생각도 깊어 푸르러라


칼칼한 소리

잔소리인 양 흘려버리다가도

싱긋 웃으며 다가서고 싶은 그대

전폐에 숨 헐떡이듯

가슴 깊이 그대 물기에 젖어

그 속,   나,  헤어나지 못하네



치자꽃 피는 밤



늦여름 매미 한 마리 시원하게 울고 간 다음 사과밭에는

사과가 뚝뚝 떨어져 쌓였다 윗마을 조씨는 매미가 울기 시작

하자 그놈 잡는다고 온종일 소리를 쫓아다니다 저녁 무렵에

야 잔뜩 불쾌해진 얼굴로 돌아와 무논밭 나락처럼 쓰러졌다


물의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치자나무 휘몰아치는 바람에

도 아랑곳없이 하얀 꽃잎 마구 피워올리더니.... 소주병 뒹

구는 건넌방 처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방 총각 훔쳐보고 있

다 냄새인 듯 향기인 듯 코끝 맴도는 페로몬향 가득 떠다니

는 밤




散骨을 하며

-어머님께



오늘따라 하늘이 너무 맑습니다

산색 더욱 푸르러 여름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집을 한 채  지어주셨으나 저는 당신에게 산집

한 채 지어드리지도 못합니다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물러 고단하고 싫증이 났을 터이므로

저는 당신을 훠이 훠이 풀어드립니다


더러는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가십시오

더러는 주린 날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가 먼 땅에 다시 태어

나십시오

더러는 빗물에 씻겨가 물색 산천어와 노니십시오

더러는 나무와 풀도 기르십시오

그리고 더러는 꽃으로 피어 가을날 저희들 찾아오는 길 따

라 손을 흔들어주십시오

당신은 꽃을 많이 기르고 싶다 하셨지요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



당혹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

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적막한 귀가



[매너모드] 3월 10일 월요일 오후 열시 삼십팔분 오늘 하

루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에

행여 들리지 않을까 진동으로 해놓고 온종일 들고 다니면서

혹 손떨림을 느끼지 못했을지 몰라 가끔씩 들여다보았지만

[부재중 전화]  표시는 없었다 누구도 전화하지 않은 거다 아

무도 날 찾지 않은 것이다 어디에요 언제 들어올 거에요 하다

못해 그런 전화마저도 없었다


젊은 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돌아다닐 때 버스에서 만난

한 여자가 물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

데요 혼자 다니면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할까..... 혼자는 외

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

른다....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싶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오늘도 참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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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시 다산책방



강강술래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장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쓰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화자는 지하도에 누워 있는 노숙자에게서 문득 자신을 발견

한다. 무언가 이루려 발버둥쳤지만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

고 만 자신을. 깊은 회한이 묻어나는 시지만 무척 아름답다. 언

어의 조탁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이시는 전범이 될 만하다.

우리말을 이만큼 깔끔하고 세련되게 활용한 경우를 보기란 그

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   이재무




강물은 이제 범람을 모른다

좌절한 좌파처럼 추억의 한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내면 다스리는 자제력 갖게 된 이후

그의 표정은 늘 한결같다

그의 성난 울음 여러번 세상 크게 들었다

놓은 적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약발 떨어진 신화

그의 분노 이제 더 이상 저 두껍고 높은

시멘트 둑 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늘 권태의 얼굴을 하고 높낮이 없어

저렇듯 고요한 평상심,  일정한 보폭 옮기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서 지혜를 읽지 않는다

손,  발톱 짜지고 부숭부숭 부은 얼굴

신음만 깊어가는, 우리에 갇힌 짐승 마주 대하며

늦은 밤 강변에 나온 불면의 사내

연민,  회한도 없이 가래 뱉고 침을 뱉는다

생활은 거듭 정직한 자를 울린다

어제의 광영 몇 줄 장식적 수사로 남아 있을 뿐

누구의 가슴 뛰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징후,

예감도 없이 강물은 흐르고 꿈도 없이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찬란한 야경 품에 안은 강물은

저를 감추지 못하고 

다만,  제도의 모범생 되어 순응의 시간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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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이레





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꺽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청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 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토막말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 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가시내   <한국 설화집>




사내는풀섶을헤치고빨간뱀딸기를찾았다뒤따라풀섶

에뛰어든계집애의치마폭은이슬에흠뻑젖어있었다나눠

먹자잉하늘엔먹구름이흘렀고여치가찌르르울었다소나

기가내려서사내에는계집애를등에업고분냇물을건넜다

남녀칠세부동석말이야엄청나지만두메산골어린계집애

와사내사이에그런게있을리없다세월이흐르고논두렁에

영산홍이필때황소를끌고가던사내애가그계집애를만나

자얼굴이빨갛게되어말을건넸다니오래간만이다잉계집

에는무슨이유인지는몰라도목덜미까지빨개져서달음박

질을쳤다눈앞에보얗게비구름이밀려오고달리다가엎어

져도무릎은아프지않았다가슴만할딱일뿐이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피는 꽃은 어이 그리 곱고,

지는 꽃은 어찌 그리 서럽던고, 아아, 그 뜨거운 달은

하늘에 어이 그리 오래오래 떠서 질 줄을 모르던고.

사랑은 스스로 길이되고,

사랑은 스스로 벼랑이 되고,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이고,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말이다.

우리네 삶은 아직도 목메게 불러야 할 이름이 많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아직도 목이 터져라 외칠 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아, 종잡을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여!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이여!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가버리는 그찰나여!

사람들아!

사랑은 기도와 같나니,


사람이 사랑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

저문 강가에 나무처럼 서서 하루를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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